트리오의 혈맹, ‘자존감과 자존심과 자신감’
오가는 말속에 혼용해서 쓰는 단어들이 왕왕 있다. 그중에 자존감, 자존심, 자신감 이 단어들은 마치 삼둥이처럼 뭉쳐 다닌다. 그놈이 이 놈 같고, 이놈이 저 놈 같은 알쏭달쏭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본연의 뜻을 찾아보면, '자존감'은 나를 존중하는 마음. 즉 스스로의 존재에 중심을 둔 being이라는 개념이다. '자존심'은 타인에게 존중받고자 하는 마음이다. 인정 욕구가 대표적이다. '자신감'은 뭔가 할 수 있다는 행위와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행위에 바탕을 둔다.
우리는 이 세 단어를 마구잡이식으로 골라 쓰는 일이 흔하다. 자존심의 문제가 자존감으로 둔갑하고, 자신감이 자존심과 등치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각각의 단어를 개별적으로 풀어놓으면 그것이 지향하는 결이 전혀 다르다. 그러면서도 상호 끈끈하게 관계를 형성한다. 직계존속이나 직계비속처럼 혈통을 자랑한다. 마치 네가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처럼.
다만 나는 자존감과 자존심 그리고 자신감 이 세 가지가 따로국밥식이 아닌 ‘콤보’로 이뤄질 때 삶의 숙성은 한층 농밀해진다고 확신한다. 이 세 가지를 적절하게 버무린다면 맛깔난 인생을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자존감이 나를 향한 안전망 노릇을 하고, 적당한 자존심이 내가 누군인지 정의하는 구실을 할 경우다. 그 양단간의 균형을 잘 유지해 나간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일순간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이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배양한다면 자존감과 자존심은 더욱 세를 불릴 것이다. 이른바 자존감과 자존심이 삶의 기획자라면 자신감은 실행을 전제로 움직이는 행동대장인 셈이다.
인생의 굴곡을 거치며 시기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부분이 과할 때가 있다. 또 결핍의 시기에는 자존감이든 자신감이든 영락없이 초라해질 때도 있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치달으면 자존심과 자신감도 덩달아 급전직하한다. 자존심이 무너지면 자존감에도 균열이 일고 자신감은 한없이 쪼그라드는 법이다.
미혹을 넘어 불혹을 훌쩍 넘은 나이. 이제 지천명을 바라보는 40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 올해 이직을 하고 본의 아니게 팀장까지 맡은 작금의 상황에서, 하루하루 이 세 가지를 떠올리며 힘겨운 생을 밀어내고 있다. 전 직장과는 전혀 다른 업무를 맡으며 자존감이 반으로 줄고, 자신감도 생채기를 입었다. 쓸데없는 자존심만 내세우며 나와 타인을 몰아붙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틈만 나면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종용하는 편이다. 자존감이 균열과 파열음을 낸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애써 무시하며 경고음을 흘려보낸다. 업력과 경험만 믿고 덤볐다가 호되게 당하는 중이다. 사장에게 깨지고, 본부장에게 믿음을 심어주지 못하다 보니, 그간 쌓아온 ‘존재(being)’에 심각한 물음표가 달린다. 자존감이 ‘0’으로 수렴되는 소멸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쪼그라드는 자존심도 예외가 아니다. 주눅 들고 살고 싶지 않지만, 이걸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친구 S는 육아휴직을 하고 가게를 차렸다 쫄딱 빚만 지고 망했다고 한다.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는 데 나이 때문에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인생 경험했다고 괜히 어쭙잖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가 생의 밑바닥에서 마주해야 했던 S의 자존감과 자존심 그리고 자신감만 되려 소거시킨 꼴이었다. (진심으로 미안하이 친구. 내가 생각이 짧았소. 우리 나이가 이렇게 힘들구나 싶네 그려.)
생의 후반전이 남은 지금 어쩌겠는가. 자존감도 지켜내고, 자존심도 살리면서, 자신감만큼은 충만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란 듯이 잘해보리라는 약간의 우격다짐 속에, 오늘도 신발끈 우지끈 동여매고 총성 없는 삶의 전쟁터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