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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Dec 21. 2024

때론 일상의 완벽이 노크할 때

감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 우리의 삶은 축복이다!


가끔은 일상이 내가 바라는 방향대로 흘러갈 때가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우며, 관계의 흠집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완벽한 상황. 소소한 부분에서 감동하고, 흥을 채우고, 용기를 추동한다.  미미하지만, 그 미세한 떨림이 삶의 지난함을 다독이고 품으면서 다음을 기약하게 만든다. 이런 잔잔한 일상이 켜켜이 쌓이면서 삶은 단단해진다. 슬픔을 용해하고 고통을 누그러뜨린다. 때론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추억을 곱씹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누군가에겐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어제가 나에겐 그런 일상의 완벽함이 노크했다. 식탁에 앉은 아들이 한 시간이 넘도록 엉덩이를 붙이고 영어공부를 하고, 스스로 감기약 용량을 재량 하며 털어먹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그 시간 그 공간에서 나는 평소 읽던 책의 진도를 50% 이상 빼고, 운동복으로 환복 한 후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산책길을 다녀왔다. 휴대폰 건강앱에 1만 200보가 찍힌 정량화된 수치를 확인하며, 오운완(오늘도 운동 완성)을 외치며 집으로 컴백. 동시에 아내는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풀어내며 나름의 말벗을 청했다. 중간중간 "그래?" , "맞아", "그럴 수 있겠네" 등등 추임새를 맞추며 나는 이야기의 합을 맞췄다.




세심함을 바탕으로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런 감각이야말로 힘겨운 삶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이 된다. 다만 이런 감각이 자연스럽게 잉태하기까지는 부단한 노력이 따른다. 나는 감사일기가 도움이 컸다. 매일매일 하루를 성찰하고 돌아보면서 작은 부분, 소소한 찰나, 가벼운 순간을 귀하게 여기는 생각과 마음이 누적되면서, 감각의 크기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적어도 일상의 남루함과 비루함을 토로하는 횟수는 현격히 줄었고, 타인과의 관계도 한결 부드럽게 변했다. 감각의 크기를 키우는 일은 삶을 더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트리거가 된다.


반면 감각의 부재는 고립을 자초하는 악수다.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보더라도 그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거나 묵과하거나 또는 간과한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어쩌면 인생을 제한된 시각으로만 사는 것이 아닐까. 이런 사람들은 형용사와 부사 등 수식어를 꺼린다. 좋게 말하면 명사와 동사 위주의 주된 요체만을 선택해 본질에 충실하고자 애쓴다. 물론 고된 인생살이에서 쏟아지는 각종 무게의 더미에서 자신만의 필터링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눈은 필요하다.


하지만 감각이 부재하다는 것은 인생의 파트너로서, 동행하는 벗으로서, 그 매력이 반감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때론 일상의 너머에서 형이상학을 논하고 싶은 어느 일방의 욕구가 상대방의 형이하학이란 실제와 부딪칠 때 일어나는 파열음은 급기야 관계의 단절로 이어진다. 예컨대,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합치되지 않은 갈등이 급기야 최악으로 치달을 때, 나는 공감되지 않는 감각의 부재에서 비롯된 영향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감각하는 사색의 시간들. 축약과 소거의 삶을 향하는 총론보다 세밀하고 세심하게 다가가는 각론의 인생이 잔잔하지만 더 즐겁지 않을까. 결론부터 해석을 던지는 두괄식이 아닌 가벼운 일상이 촘촘하게 쌓인 미괄식의 생이 좀 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아이의 영어공부에서 시작된 사색의 끝이 감각의 부재에서 벗어나 그 소중함을 일깨운다. 삶의 해상도가 한층 커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감사일기를 비롯해 산책, 운동, 명상, 독서, 글쓰기 등 온몸을 휘감는 감각을 확장하는 꺼리들을 다짐한다. 때론 일상의 완벽함이 노크할 때를  알아채는 느낌이 고맙다. 내일도 감각의 시간으로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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