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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낱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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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Dec 03. 2020

나의 외할아버지는 이발사셨다.

낱장 일기20

나의 외할아버지는 이발사셨다. 외할아버지의 이발소는 충청남도 논산에 있었는데, 기차역이 바로 앞이라 역전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이발소 이름도 간단했다. ‘역전 이발소’였다. 역전 맞은편에는 시내버스터미널이 있었다. 1층짜리 누런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명절에 친척 형들과 시내버스터미널 지하에 있던 피씨방을 갔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의 풍경, 기울어진 보도블럭, 파란색 공중전화박스가 있었던 것도 생각난다. 20년도 넘은 일인데, 엊그제라고 할 것은 아니지만, 기억 속의 그곳은 잔뜩 정겨운 톤으로, 오래된 영상 특유의 낮은 채도를 가진 모습으로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논산역을 바라보고 시외버스터미널의 오른쪽으로 오십 걸음도 안 되게 걷다 보면, 미닫이 형식의 갈색 철문을 가진 2층 높이의 건물이 보인다. 문의 윗부분은 창문이었고, 연한 하늘색으로 빛바랜 격자무늬 시트지가 발라져 있었다. 거기엔 큼지막한 빨간 글씨로 한 글자씩 붙어 있었다. ‘이. 발. 소.’라고.

얇은 철판 문을 옆으로 열고 들어서면, 어디에서나 흔하게 보던 뭔가 점점이 박힌 느낌의 돌바닥이 발밑에 놓인다. 왼편에는 담배를 파는 조그만 카운터가, 정면에는 이발소 특유의 견고한 느낌의 이발의자 3개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고, 오른편에는 목욕탕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세면대가 있었다. 어린 나는 위층에서 검은색 브라운관 티비를 보거나(2층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집이었다), 종종 1층으로 내려와 카운터 옆에 앉아 있곤 했다. 아직도 그때 보았던 담배 이름이 몇 개 기억난다. 솔, 디스, 한라산, 88, 장미(빨간 테가 둘러져 있고, 담뱃갑 자체가 호리호리하니 이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시나브로. 특히 시나브로는 그 이름이 특이해서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이라는 의미가 어쩐지 부드럽게 들렸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 말인즉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담배에 중독된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는 게 아니었을까 싶긴 하지만, 시나브로 그땐 그냥 그 어감이 좋았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내 어린 시절 이발은 고민할 것도 없이 모두 외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생각해보면 외할아버지는 우리 형제의 전담 이발사셨다. 나는 어릴 때도 키가 작아서 큰 이발 의자에 그냥 앉으면 의자에 푹 파묻혀버려 이발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매번 얇고 긴 나무 합판을 팔걸이 사이에 걸쳐 놓고, 그 위에 앉아 이발했던 것이 생각난다. 외할아버지가 가위질을 시작하시고, 그 작던 머리 주위로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어찌나 잠이 쏟아지던지 나는 매번 속절없이 잠이 든 채로 고개를 연신 꾸벅꾸벅해댔다. 그 모습을 지금의 내가 봤더라면, 얼마나 웃었을까. 그렇게 잠에 취해있던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것은 마무리 면도 때였다. 이발이 얼추 끝나갈 때면, 외할아버지는 사발 모양의 조그만 플라스틱 그릇에 잔뜩 거품을 내어 큼지막한 도장 크기의 솔에 거품을 잔뜩 묻히고는 아직 합판 위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는 나의 구레나룻과 목 뒤에 부드럽게 바르셨다. 그 거품이 차가워 매번 몸을 바르르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거품을 바르고 나면 외할아버지는 이제 가위가 아닌 자그마한 면도칼을 손에 쥐시고 깔끔하게 머리끝을 정리해주셨다. 차가운 거품을 걷어내며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짧은 면도칼. 그 서걱이는 느낌은 정말이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렇게 이발이 끝나고 외할아버지는 나를 들어 이발 의자에서 땅으로 내려놓고, 세면대로 가 머리를 감겨 주셨다. 당시엔 너무나 높았던 세면대에 끝에 손을 얹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으면 모든 게 끝나 있었고, 그렇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머리를 외할아버지는 양손에 수건을 잡고 빠르게 흔들어 물기를 털어주셨다. 그리고 문득 그 수건이 머리카락을 빠르게 스치는 느낌이 이제와 그립다. 지금은 사라진 내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의 역전 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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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순천드라마촬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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