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장 일기26
어제 고속버스에서 내려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길 한쪽에 젊은 사람 두셋이 간이 테이블과 다양한 색깔의 동그란 스티커가 붙은 하드보드지를 옆에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보려 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설문조사나 서명운동처럼 보였다. 앞서 걸어가던 사람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 그냥 평소대로 지나치려 했으나 타이밍이 너무 적절했던 탓인지 눈빛이 마주쳤던 탓인지 그들 중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단순한 설문조사라 생각했던 나는 그저 스티커 정도 붙이면 되는 건가 싶어서 그날따라 별 거부감 없이 걸음을 멈추어 그들 앞에 섰다. 판넬에 나뉘어진 여러 분야 중 최근에 관심이 생겼던 환경 문제 영역에, 여전히 별수롭지 않은 마음으로, 스티커를 붙였다. 그러나 이들이 내게 건넨 주제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는데 바로 n번방 피해자들과 관련된 문제였다. n번방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최근의 이슈가 떠올랐고, 나 역시도 그 반인륜적인 끔찍한 사건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사건을 알고 있느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여전히 피해자들의 열악한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마치 그것이 어렵지 않은 일인 것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서명을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게 설명하던 그 남자는 다소 당황해서 그게 아니라 n번방 피해자들에게 후원을 해주실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 나도 다소 당황했다. 후원은 당장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선택지였고, 지금의 내 처지, 백수에 불과한 입장을 떠올리며 난처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러자 남자는 조금이라도 후원을 해주실 수 없느냐고 말했고, 내가 여전히 망설이자 고등학생들도 후원하고 갔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나는 죄인이 된 것처럼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뒤돌아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누군가의 가면 뒤에 숨겨진 위선을 보는 것은 통쾌한 면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 누군가가 내가 아닐 때의 이야기다. 다른 이가 아닌 나의 위선을 마주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다. 어제 그 자리에서 벗어나 버스를 기다리던 나의 마음은 끔찍했다. 나는 선의를 가장했지만, 거기에 돈이 끼어든 순간, 나의 가면은 벗겨졌고, 나는 비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나치며 마주치는 모든 것에 후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현실적으로 그때의 내 행동이 잘못은 아니라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내가 제3자의 입장을 상상하여 나의 행동을 비호하는 순간적인 자기합리화도 너무나 역겨웠다. 나는 그 순간의 내 머릿속이 궁금하다. 망설이고 끝내 돌아섰던,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찰나의 생각의 과정이. 아무리 갖은 변명을 대보아도 내가 망설였고, 뒤돌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몇 천 원이라도 후원을 해볼 걸 정류장에 서서 생각도 해봤으나 그것 역시도 너무 늦어버린 자기기만은 아니었을까.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마음 깊이 공감한다면서 결국 나는 이렇게 말뿐인 위선적이고 비겁한 인간이었던가. 버스 차창 밖으로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나의 마음도 짙어져 가는 자신에 대한 혐오로 어두워져 갔다.
나는 그때의 수치를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어쩌면 이마저도 기만적인 생각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다음에 그런 순간이 다시 찾아온다면, 적어도 한 번은 적은 금액이라도 망설이지 말고 후원해보겠다고. 나는 비겁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비겁하진 않을 것이라고. 나는 그 날의 수치를 기록한다.
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