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걸 읽고 컸구나...
어린이들이 읽는 많은 동화들의 원작자로 유명한 덴마크의 작가 안데르센은 평생에 걸쳐 연애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늘은 그에게 글솜씨를 주고는 연애운을 뺏아갔던 것일지도 모르죠. 몇 번의 열렬한 교제 시도를 모조리 실패한 경험은 안데르센의 이성관에 나쁜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비뚤어진 이성관은 그가 지은 동화들에서도 투영되는데, <인어공주>, <엄지공주>, <성냥팔이 소녀> 등 그가 작품에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여성들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거나 불행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비참한 히로인 원톱으로 꼽히는 그녀, 카렌의 <빨간 구두> 이야기가 떠올라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옛날 옛날에 홀어머니와 단 둘이서 사는 카렌이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었어요. 카렌은 신발 한 켤레를 살 돈도 없을 만큼 가난했답니다. 동네 구둣방 주인은 맨발로 다니는 카렌을 딱하게 여기고는 가게에서 영 팔리지 않던 빨간 구두를 선물해줬어요. 예쁜 구두를 평생 처음 신어보는 카렌은 뛸 듯이 기뻐하며 구둣방 주인에게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병이 있던 카렌의 어머니가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카렌은 슬퍼하며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장례식에 입을 검은 옷, 그리고 검은 구두도 필요한데... 하지만 가난한 카렌에게 구두는 선물로 받은 빨간 구두 한 켤레 뿐이었어요. 어쩔 수 없이 카렌은 빨간 구두를 신고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웬걸, 길을 지나던 할머니 한 분이 빨간 구두를 신고 있는 불쌍한 카렌의 모습을 발견했어요. 할머니는 장례식에 빨간 구두를 신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전해 듣고는 오갈 곳 없는 카렌을 키우기로 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카렌은 할머니네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어요.
할머니는 다른 동네 사람들처럼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분이었습니다. 카렌도 일요일이 되면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곤 했어요. 예쁜 빨간 구두를 신고 말이에요. 하지만 카렌이 교회에 갈 때 단정한 색의 검은 구두를 신기를 원했던 할머니는, 카렌에게 돈을 주면서 교회에 신고 갈 검은 구두를 사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구둣방에 간 카렌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검은 구두가 아니라 예쁘고 화려한 빨간 구두였습니다. 카렌은 당장 빨간 구두를 신고 싶었지만, 할머니가 준 돈으로 검은 구두와 빨간 구두를 다 살 순 없었어요. 결국 카렌은 빨간 구두를 사고는 할머니에게는 검은 구두를 샀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가엾은 할머니는 너무 눈이 나빠서 카렌이 사 온 구두가 검은 구두인지 빨간 구두인지 볼 수 없었습니다.
카렌이 빨간 구두를 신고 교회에 가자 온 동네의 청년들에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카렌은 기분이 우쭐했어요. 그런데 교회의 문지기는 카렌의 구두를 보더니, 그런 예쁜 구두는 무도회장에서나 신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빨간 구두를 신은 카렌의 발이 멋대로 움직이며 카렌을 춤추게 만들기 시작했어요. 카렌은 춤을 멈추고 싶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실컷 난동을 부리고, 사람들이 몇 명이나 달라붙어 신발을 벗겨낸 후에야 카렌은 춤을 멈출 수 있었어요.
그렇게 곤란과 창피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카렌이었지만, 자리에 눕고 나니 눈앞에 빨간 구두가 어른거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렌을 양녀로 받아주시던 착한 할머니는 몸져 눕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를 간호해야 했던 카렌이었지만, 머릿속은 오직 예쁜 빨간 구두를 신고 무도회장에 가서 뭇 남성들의 주목을 받을 생각이 꽉 차 있었어요. 참을 수 없었던 카렌은 밤새 신발장 구석에 처박아둔 빨간 구두를 꺼내 할머니 몰래 신고 무도회장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카렌이 무도회장에 들어선 순간 구두는 이전에 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카렌은 구두를 벗어보려 했지만 구두는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카렌의 발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어요. 구두는 쉬지 않고 춤을 추었습니다. 카렌은 할머니를 속이고 몰래 무도회장에 나왔기 때문에 벌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며 자책했습니다. 아무도 멈출 수 없었던 구두 때문에 카렌은 밤낮으로 춤을 춰야 했습니다.
카렌이 그렇게 간호에 소홀해진 탓에 가엾은 할머니는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카렌은 사랑하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장례식이라도 참석하고 싶었지만 구두는 카렌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 춤을 추게 했습니다. 멈추지 않는 춤을 추던 카렌은 멀리서 할머니의 운구 행렬을 보며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카렌이 신은 구두는 어느새 춤을 추며 사형집행인이 사는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카렌은 사형집행인을 불렀어요.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소원이 있어요, 내 발이 저주를 받아서 춤이 멈추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저의 발목을 잘라주세요...
사형집행인은 카렌의 요청대로 발목을 잘랐습니다. 그제서야 카렌은 멈추지 않는 춤을 추게 하는 빨간 구두의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 우리가 읽은 동화에서는, 카렌은 이후 교회로 들어가 봉사활동을 하며 참회의 날들을 보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짜잔- 사실 잔혹 동화였습니다. 카렌은 발을 잘라내고 춤으로부터 해방된 줄 알았지만, 잘린 발목은 카렌을 떠나지 않고 주변에서 끊임없이 춤을 췄어요. 발목을 잘라도 끝나지 않는 빨간 구두의 춤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카렌은 서서히 미쳐갔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죽은 카렌이 묻힌 무덤 위에서 빨간 구두는 그 발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춤을 췄답니다.
다시 봐도 막나가는 스토리 진행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 이야기를 지은 사람은 아주 가학적인 성향의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게 안데르센이라니... 게다가 어린이용 동화는 그래도 나름의 각색을 해서 충격적인 부분은 어느정도 양념을 쳐서 내곤 하는데, 어린 아이들이 읽는 책에서 도끼로 발목을 치는 부분을 그대로 내보낸 덕분에 저는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을 지경입니다. 우리 이런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조심해서 보여주도록 합시다.
그리고... 물건이 이상하면 지체없이 A/S를 받읍시다. 신발을 신었더니 제멋대로 춤을 춘다던가 휴대폰이 충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폭발한다던가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