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갖고 있는 정의 그거, 정말로 정의로운 걸까요?
2002년 여름 월드컵의 그 뜨거웠던 8강전을 기억하시나요?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스페인을 축구 변방인 우리나라 대표팀이 꺾었던 그 경기는,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난 오심 논란으로도 무척이나 뜨거웠습니다. 골라인에 닿았던 공을 스페인 선수가 걷어내 골을 넣으며 스페인의 승리로 경기가 끝날 뻔했는데, 당시 심판이 골라인을 넘었다며 무효를 선언했던 일이죠. 그 뒤로는 아시다시피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우리나라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론은 일방적으로 '골라인을 벗어난 것이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벗어남. 아무튼 벗어남!' 하지만 당시에 같은 장면을 보고 있던 스페인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안 벗어남. 아무튼 안 벗어남!!'
왜 같은 일을 두고 우리나라 사람들과 스페인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판단을 내릴까요? <옳고 그름>의 저자 조슈아 그린은 이 책을 통해 이 모든 것이 뇌의 진화의 결과라고 알려줍니다. 게다가 이 책은 우리 인류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도덕 원리가 공리주의라고 선언하는 대담한 시도까지 했네요. 그게 뭐시 중허냐고요? 아마 우리는 연구가 시작된 지 고작 수십 년에 불과한 뇌공학이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덕철학/도덕심리학의 이슈들을 잡아먹는 시대의 초입에 들어선 건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많은 부분에서 행동경제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대니얼 카너먼의 책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을 닮아 있습니다. 실제로 저자 조슈아 그린은 자신의 책을 '도덕적 생각에 관한 생각(Moral Thinking: Fast and Slow)'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책이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핵심 개념인 무의식과 의식을 표현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을 빠뜨릴 수가 없네요.
두 책은 공히 인간의 판단 과정을 크게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로 나누었습니다. <옳고 그름>에서는 '자동 모드'와 '수동 모드',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는 '시스템 1'과 '시스템 2'로 명명했는데,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보입니다. 먼저 '자동 모드', 또는 '시스템 1'은 무의식의 세계입니다. 의식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도 처리가 가능한 사고는 이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직관과 감정을 담당하며, 충분한 정보가 없더라도 현재의 정보만으로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는 '휴리스틱(어림짐작. <옳고 그름> 번역판에서는 '약식 발견술'이라고 번역)'이라는 장치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익숙한 출퇴근길을 간다거나 사람의 첫인상을 판단할 때 우리는 심사숙고하지 않습니다. 심사숙고하지 않고도 판단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시스템 1'이 판단했다는 것이죠. 반면 조슈아 그린 버전 '수동 모드', 대니얼 카너먼 버전으로는 '시스템 2'는 이성과 논리, 계산의 영역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일, 오래 생각해야 하는 일이 과제로 주어질 때에는 '자동 모드'가 이를 처리할 수 없어 '수동 모드'에게로 넘겨주는 것이지요. 조슈아 그린은 이러한 사고 과정을 진화의 결과로 나타난 데이터의 효율적 처리 구조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무의식의 데이터 처리 능력은 의식 부분을 크게 뛰어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판단은 의식과 무의식 중 어느 영역에서 일어날까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도덕적인 판단이 고결한 의식 행위의 결과라고 믿어 왔습니다. 이마누엘 칸트는 심지어 <실천이성비판>에서 '내 마음을 경외심과 감탄으로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물리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내 마음의 도덕률(도덕적 법칙)이다'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도덕이 이성의 영역이라는 것이 진짜 사실인지 궁금해진 저자는 마침 신경정신학 분야의 연구로 유명했던 조너선 코언(과 그의 fMRI)을 만나 괴이한 실험을 기획하는데, 내용인즉슨 '도덕적 판단을 하는 순간의 뇌를 촬영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을 위해 저자는 이른바 '트롤리 딜레마'로 알려진 사고실험의 시나리오를 조금씩 변형합니다. 선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열차 앞에 다섯 사람이 묶여 있는데 열차가 오는 길 위의 육교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인부가 서 있어서 피실험자가 인부를 밀어 떨어뜨리면 열차가 멈추고 다섯 사람은 살지만 떨어진 인부는 목숨을 잃는 상황, 그리고 피실험자가 먼 곳에서 스위치를 조작해서 열차의 선로를 바꾸면 다섯 사람은 살 수 있지만 바뀐 선로 위에 있는 다른 한 사람이 죽는 상황에서 피실험자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묻고, 피실험자가 판단을 하는 순간 뇌를 촬영하는 것이죠. 두 실험은 다섯 사람이 죽느냐 아니면 한 사람이 죽느냐라는 차원에서 결과가 같도록 설계되었는데, 공리주의적으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한 사람이 죽더라도 다섯 사람이 살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는 피실험자가 직접 인부를 '떠미는' 경험을 하게 만듦으로써 인부가 사망하는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느냐, 아니면 스위치를 조작해서 간접적으로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대신 다섯 사람을 살리는 선택을 하느냐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육교에서 인부를 떠밀 것인지의 선택을 강요받은 사람들은 감정을 처리하는 뇌 부위가 크게 활성화되는 것이 관측되었다는 것이 이 실험의 핵심 결과입니다. '내가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이 도덕적인가?'라는 판단을 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의 통념이었던 '시스템 2'(=이성)가 아닌 '시스템 1'(=감정)이 작동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스위치를 조작할지 말지의 선택을 했던 사람들에 비해 인부를 떠밀지 말지의 선택을 했던 사람들 쪽에서 '열차를 내버려 둔다'의 선택을 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이 결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실험에서 인부를 떠미는 공리적인 선택을 한 피실험자들도 '시스템 1', 즉 감정의 작동을 '시스템 2', 즉 공리주의적 판단을 하는 이성이 통제하여 그 판단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시스템 1'의 즉각적인 판단과 '시스템 2'의 통제로 판단 결과를 바꾸려고 하는 사고 처리 과정을 두고 '이중과정 이론(Dual-Process Theory)'이라 이름 붙여 조너선 코언과 함께 2001년 논문을 발표하며 일약 윤리철학계의 신진 스타 대열에 오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인부를 떠밀지 않는 선택을 하기로 한 피실험자에게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물어보니 타당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대답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동 모드'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을 '수동 모드'가 설명하려 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이를 가지고 '동기화된 추론'을 설명합니다. 즉 '자동 모드'가 저질러놓은 판단에 '수동 모드'가 동기화되면서 '자동 모드'의 판단 근거를 역으로 추론하려 한다는 것으로,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지어내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한다는 것입니다. 즉 2002년 여름의 우리는 모두 '동기화된 추론'을 겪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겁니다. 동기화된 추론은 우리 머릿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이를테면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한 호감은 감정적인 판단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그 판단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역으로 만들어주는 자기합리화가 바로 동기화된 추론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자동 모드'와 '수동 모드'로 나뉜 인간의 판단 프로세스가 진화의 결과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며, 따라서 절대적인 도덕률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칸트에게 큰 엿을 날립니다. 그저 도덕은 진화의 결과 인간 사이의 협력을 가능하게 해 주는, '자동 모드'에 내장된 직관입니다. 복수나 평판 모두 궁극적으로는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서 도덕의 영역에 속합니다. 즉, 우리가 모이면 다른 사람들의 험담을 해대는 것은 진화의 결과입니다. 진짜라니까요.
사실 저는 이 글을 책의 목차 순서대로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책의 서두에 소개한 내용은 트롤리 딜레마 사고실험 같은 게 아니고, 저자가 이름을 붙이기로는 '상식적 도덕의 비극'이라는 상황입니다. '상식적 도덕의 비극'이란 '공유지의 비극'의 집단 버전으로, 부족 사이의 이기주의의 충돌을 뜻합니다. 공유지의 비극은 도덕성의 진화를 통해, 즉 '자동 모드'를 통해 부족 안에서의 평판 관리 등으로 해소할 수 있지만, 도덕성은 어디까지나 부족 안에서만 협력을 잘하도록 진화한 산물이며 부족 바깥의 다른 부족을 고려한 진화는 아닙니다. 이 책의 원래 이름인 <Moral Tribes>, 즉 '도덕 부족들'은 이러한 부족들 간의 충돌과 그에 대한 저자의 솔루션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어느 부족 안에서는 온전히 도덕적인 행동도 다른 부족에게는 전혀 도덕적인 것으로 고려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어느 부족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악한 행위로 간주하고, 또 다른 부족은 쇠고기를 먹는 것이 나쁜 행위입니다.
이러한 부족들 사이의 도덕의 차이는 부족끼리의 충돌이 없던 시절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가 좁아지면서 모든 부족들은 다른 부족들과 '상식적 도덕의 비극'을 겪을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도덕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죠. 여기서 저자가 제안하는 것이 바로 모든 부족에게 예외없이 적용될 수 있는 이른바 '고차도덕(Meta-morality)'입니다. 그 고차도덕이 뭘까요? 저자는 그것을 공리주의 또는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깊은 실용주의(Deep Pragmatism)라고 설명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고차도덕, 즉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도덕이 공리주의라는 것은 보편적 도덕법칙이 없다는 전제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입니다. 왜냐고요?
저자 조슈아 그린은 적극적으로 '질적 공리주의'를 끌어와 자신의 논지를 옹호합니다. 여기서부터 조금 어려워지지만 그래도 부연설명을 하자면, 존 스튜어트 밀의 명언,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만족한 바보가 되는 것보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에서 상징하듯 질적 공리주의는 경험의 질의 최대화를 추구합니다. 각자의 경험의 질을 최대화하는 것을 행복으로 정의하면 행복의 주관성은 객관성으로 치환될 것인데, 이를 가리켜 저자는 '공동 통화(Moral Common Currency)'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보편적 도덕법칙이 없는 세상에서는 이 공동 통화가 보편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듯합니다. 따라서 이 공동 통화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공리주의가 저자의 결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따라서 저자는 결론적으로 '부족 안의 도덕적 판단은 '자동 모드'에게 맡겨 문제를 해결하고, 부족 사이의 갈등은 '수동 모드'로 옮겨 공리주의적 해법을 내놓도록 하자'는 주장을 솔루션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공리주의에다가 '깊은 실용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이 솔루션이 매우 실용적이며 현실 세계에 쉽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윤리 입문서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외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현대 윤리 서적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사실 오늘날 나오고 있는 윤리학 관련 서적들은 20세기 윤리학계의 슈퍼스타 존 롤스의 <정의론>이 한 차례 쓸고 지나갔다는 배경을 알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정의론> 또한 이 책의 선행학습 필독서로, 이 책을 읽지 않고 <옳고 그름> 또는 다른 윤리학 서적을 읽는 것은 마치 <겨울왕국> 1편을 보지 못한 채 2편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겠네요. <정의론>에서 롤스는 공리주의를 논파하는 것이 주요 논지였고, <옳고 그름>에서 조슈아 그린 또한 롤스를 칸트와 함께 묶어 신나게 까고 있기 때문에, 롤스를 알지 못하면 '이게 뭔 말인지...' 하며 지나가게 될 겁니다.
만일 시간이 된다면 저자와 같은 듯 다른 주장을 펼치는 도덕철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책도 선행학습으로 읽기 좋습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조슈아 그린의 연구를 잘 알고 있으며 서로 인용도 하고 비판도 하는 사이로, 이 책 <옳고 그름>에서 저자가 심심치 않게 '조너선 하이트도 동의한 내용이다...'라고 언급하는 내용이 뭔지 알려면 하이트의 책을 읽어봐야겠죠. 그의 책 중에서는 <바른 마음>이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저자가 책 전체에 걸쳐서 공격하고 있는 칸트를 이해하려면 <실천이성비판>을 읽어보면 좋겠지만... 이건 저도 읽지 않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다 읽어.
쉽게 쓰는 독서감상이라고 타이틀을 붙여놨는데요... 다 뻥이죠. 생각보다 내용이 많이 길어지고 말았네요. 사실 이 외에도 적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만큼 이 책은 주장과 함의의 폭이 넓고 다양한 논거를 통해 자신의 결론에 도달한 만큼 꼭 언급해야 할 부분도 많이 늘어났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독서감상 시리즈는 독자에게 책을 읽지 않고도 읽은 척 할 수 있게 해주는 허세의 도우미를 지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