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의 여름, 48살의 그녀와 26살의 나는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다. 어디를 갈 계획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지금이 아니면 평생을 만들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직감에 여권을 만들었다. 명절 때면 늘 공항이 붐빈다는 뉴스가 이제 지겹게 느껴질 정도인 시대였지만 그녀와 나는 단 한번도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었다. 어떡하다가 이렇게 됐을까 되짚어보면 그렇다할 여유가 없었다. 집안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의 사업은 평생 롤러코스터 같았다. 아버지의 롤러코스트가 더 이상 출발하지 못하게 될 때, 생계는 엄마의 몫이 되었다. 삼시세끼 먹고 가끔 외식을 하고 여름휴가로 1박 2일 바닷가를 갈 정도는 그럭저럭 만들어졌지만, 그 이상은 꿈꾸기 어려웠다. 사실 가고 싶다는 열망조차 생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지 해외여행을 한 번도 못 가봤다는 사실이 그닥 부끄럽지도 않았다.
나는 26살에 첫 직장을 얻었다. 직장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조금 애매했다. 나는 프리랜서로 방송국에서 일을 했다. 어디 가서 당당하게 취업했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왠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 어디서 소식을 듣고 취업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면, 괜히 양심이 찔려 ‘나 프리랜서야’라고 답했다. 직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 찜찜했으나, 그래도 0원이었던 수입이 200만원 가까이 생겨난 상황은 조금 숨통을 틔워줬다. 연차를 모아모아 연말에 몰아 쓸 기회가 생겼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야할 때라고.
엄마를 설득하고 설득했다. 고작 3박 4일의 다낭행 여행인데도 스케줄 하나 맞추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어쨌든 지금의 엄마는 생계부양자였고 여행보다는 일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말에 떠나는 여행이어서 그런지 저가 항공사의 비행기인데도 비행기값은 천정부지였다. 해외여행 한번 가기 정말 힘들구나. 내가 이래서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결국 새벽에 출발하고 밤에 도착하는 왕복 비행기로 2박 3일 여행을 계획했다. 남들 다가는 다낭 여행이지만 우리에겐 다시는 없을 처음의 경험이었다. 그 해 여름 아무런 계획 없이 여권을 만들었던 우리가 그해 겨울 여권을 쓰게 됐다는 사실이 값지게 다가왔다.
여행을 다니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게 뭐라고’였다. 정말 별거 아니였다. 물론 일부러 첫 해외여행이기에 난이도가 낮은 다낭을 택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상상 그 이상으로 세상은 너무 발전돼있었고 여행은 정말 쉬웠다. 이렇게 갈 수 있는 곳을 왜 우리는 그동안 가지 못했던 걸까,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쉬운 여행이 사실 그 어떤 여행보다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2백이라도 벌고 있고, 다시 남들 사는 만큼은 엄마가 벌어왔기에 갈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엄마는 자꾸만 내가 있어서 여행을 올 수 있었다며 고맙다고 말을 했다. 그런 말이 장녀로서 부담으로 느껴져 듣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엄마는 반복해서 말했다. 결국 그만큼 좋다는 엄마만의 표현이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2019년의 마지막을 다낭에서 보내고, 1월 1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첫 해외여행+자유여행이라 아쉬운 부분도 많았다. 2박 3일 일정은 너무 빡빡했고, 다낭은 너무 도시고 한국 여행객들이 많아 해외같은 느낌이 덜 들었다. 내가 책임지고 여행을 이끌어야한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환전 사기를 조심하라는 글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공항에서 환전사기를 당했다. ‘이 때 이랬더라면..’하는 후회가 꽤 많이 남았다. 하지만 8개월이 지난 지금, 여행에 대한 후회는 한 톨도 남아있지 않다. 그 때 서툰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엄마와 나는 첫 해외여행을 언제 갈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었을 거다. 아주 어설픈 여행이었지만 무작정 떠난 게 결국 좋은 선택이 되었다. 그래서 후회가 되더라도 머뭇거리기보다는 질러보는 게 더 낫다고들 하는 것 같다. ‘안하고 후회하는 것 보다는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 코로나 확진자가 다시금 늘어난 오늘, 더 마음 속 가까이 느껴지는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