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자유로워지자
현시(顯示)의 뜻을 찾아봤습니다. "나타내 보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더군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는 어떻게 들어가는 걸까요? 톨레는 명상을 제안합니다.
몸을 편안히 쉬게 하고 눈을 감으십시오. 몇 번 심호흡을 하십시오. 아랫배로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을 느끼십시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아랫배가 어떻게 부풀고 가라앉는지 관찰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몸 안의 에너지 장을 전체적으로 인식하십시오.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느끼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마음으로부터 의식을 되찾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하고,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눈을 감고, 그저 인식하고, 느끼면 마음으로부터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현시되지 않은 세계를 만나고 머무르게 되면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는데요.
진정한 자유로움이란 그러한 형체 없는 영역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눈에 보이는 모습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되고, 더 이상 모습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갖가지 조각으로 쪼개지기 이전의 차별 없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현시되지 않은’ 세계, 만물의 보이지 않는 근원, 만물의 내면에 있는 존재 자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깊은 고요와 평화의 영역이면서도 기쁨과 생동감으로 충만한 공간입니다.
저는 요즘 얽매이지 않는 것, 자유롭다는 것이 '행복'한 것보다 훨씬 깊게 다가옵니다. 일반적으로 행복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라 말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져서 행복'합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어도 친구를, 연인을, 귀인을 만나서 행복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내서 좋은 곳을 가거나, 맛있는 것을 먹어서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어떤 것을 '가져서 행복'하다면, 상대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불행'하거나 '지루'해질 수 있는데요. 매일 똑같은 일들만 일어나는 평범한 매일을 지내다 보면, 특별하게 '행복'을 느끼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범사에 감사'하고 '사소한 일에 행복'을 느끼라는 건 또다시 어떤 의무를 지우는 것 같아 부담스럽습니다.
반면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어떠한 타격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죠. 안으로도 밖으로도 부딪히고 저항하는 마음에 휘둘려본 경험이 있다면 아마 이 '진정한 자유로움'을 누구나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톨레의 방법을 공유합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영적인 수행을 해보세요. 부지런히 삶을 영위해 나아가되, 주의력을 완전히 외부 세상과 마음에 빼앗기지는 마십시오. 일부는 내면에 남겨두십시오. 여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일상적인 활동에 종사하고 있을 때, 특히 사람이나 자연과 만날 때면 내면의 몸을 느끼십시오. 내면 깊숙한 곳의 고요함을 느끼십시오. 그 현관문을 열어두십시오. 당신은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현시되지 않은 세계를 의식할 수 있습니다. 외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신의 뒤쪽 어딘가에서 깊은 평화의 느낌으로,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는 고요함을 당신은 느낄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 바쁠수록, 할 일이 많을수록 하루 5분만 시간을 내어 '내면의 몸'을 느끼는 명상을 하고, 고요함을 느낀 후, 거기서 완전히 떠나오지 않는 겁니다. 저는 현관문을 열어둔다는 표현을 머릿속에 이미지로 떠올리며 오늘 하루 일과를 시작했는데요. 파주에서 강남까지 거의 2시간이 가까운 여정에도, 돌아오는 길에 금요일 직장인들의 퇴근 행렬에 지옥철에 밀리면서도 저는 마음의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산역에서 파주로 오는 좌석버스 자리가 바로 제 앞에서 끊길 뻔했을 때도 저는 고요했어요. 계속 고요했더니 주어진 상처럼, 버스 기사님 확인 결과 한 자리가 남아 있어서 저는 무사히 귀가했습니다.
아! 이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제가 고요하길 선택했더니 많은 일들이 그저 고요히 흘러갔고, 세상이 훨씬 고요해진 느낌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시도해 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