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ALAXY IN EUROPE Nov 16. 2024

성숙한 인간관계

나에게로 먼저 들어갈 것

당신이 의식적인 현존에 자주 접근하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관계, 특히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는 점점 손상되다가 끝내는 부작용을 일으킬 것입니다.


톨레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들어갈 것을 강조합니다. 상대방에게 친절하고, 사랑을 나누기 이전에 내가 현존해야지 그 친절과 사랑이 지속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 애정은 한순간에 부정적인 감정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애정은 한순간에 잔인한 공격성을 낳거나 지독한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이제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이 어떻게 정반대의 감정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 느낀 사랑은 단지 습관적인 소유욕과 집착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요?
사진: Unsplash의 Andrik Langfield

항상 궁금했어요. 우리는 분명 사랑하는 사이가 맞는데, 그로 인해 상처받고 아파하는지, 그리고 내가 아픈 만큼 상대방도 아팠으면 좋겠는지. 소유욕이나 집착으로 치부하기에는 정말 아름답고 소중한 감정인데, 내가 그를 위하는 마음은 진짜이고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더 아프고 힘든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궁금해졌죠. 그리고 그 아픈 관계가 끝나고 나서 다시는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던 사랑은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것처럼 다시 영글어지고, 행복할 것만 같던 마음들은 다시 지옥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보도 아니고, 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반복할까요? 

... 특별한 관계가 생깁니다. 그것은 에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듯합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모든 것들이 이젠 상대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대신해 주고, 당신의 삶에 의미를 주고, 당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단 하나의 초점,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것입니다. ... (중략) ... 그러나 상대방의 행동 방식이 당신의 에고가 바라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가 옵니다. 그러면 에고의 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두려움, 고통, 결핍과 같은 느낌들이 그동안 사랑이라는 감정에 의해 덮여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듭니다.

역시 '에고'가 문제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에고의 집착과 중독을 착각한 것입니다. 에고는 '세상 vs 나'의 대결구도에서 나를 구원해 줄 구원자로 '사랑하는 연인'을 등장시켰다가, 에고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른 방식으로 상황이 흘러갈 때 '나의 연인 vs. 나'의 대결구도로 바꿔버립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은 구원자가 아닌 나의 '적'이 되는 거죠. 구원을 받은 줄 알았던 나는 더 큰 절망에 빠져 그곳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사랑하는 연인'을 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같다고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당신 자신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십시오. 그런 다음엔 당신의 파트너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십시오. 변화를 위한 가장 커다란 촉매는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선 생각의 구조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수용'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했으니 잘못했고, 사과를 했는데 상대방은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니, 더 나쁜 사람이라는 식으로 판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나쁘다는 생각도, 내가 옳고 저이가 틀렸다는 생각도, 열 번 중에 여섯 번은 내 말이 맞다는 생각도 다 부질없습니다. 그 끝은 결국 정해져 있지 않을까요? 

서로를 탓하지 말고, 느끼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자신을 방어하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십시오. 상대방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주십시오. 현존하십시오. 그러면 비난, 방어, 공격 등 에고를 강화하고 방어하고 만족시키려는 모든 방식이 부질없이 여겨질 것입니다

결국은 현존입니다. 말하지 않고 듣되, 느끼는 것은 그대로 표현합니다. 나를 방어할 필요도, 상대방을 걱정할 필요도, 서로를 공격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주일 넘게 연인이 연락이 없다는 것은 그저 사실입니다. '바빠서 그랬겠지.'하고 이해할 것도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하고 화를 내는 것도 결국은 나의 선택일 뿐입니다.

하지만 경계심을 늦추지 마십시오. 반응을 보이지 말고, 후퇴하고, 무감각하십시오. 모든 감정에서 초연한 척하면서 자신이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는 경향은 없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적어도 자신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없으며, 문제는 모두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척'하면 안 됩니다. 나는 다 이해하는 척, 초월한 척하면서 내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을 때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깨닫고 현존하고 있는데, 왜 저이는 그렇지 않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현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깨우치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먼저 깨달으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깨우치지 못했다고 상대방을 탓하지 마십시오. 말다툼을 시작하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마음가짐과 동화되어 있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고에게 당신 자신을 넘겨준 것입니다. 

누가 깨우쳤는지 못 깨우쳤는지, 누가 먼저 깨우쳤는지, 누가 얼마나 많이 깨우쳤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입니다. 결국 모든 판단과 비교는 방어와 공격의 기준이 되고, 에고가 가장 잘 써먹는 방법이니까요. 


톨레는 연인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는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저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깨달은 척'을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는데요. 처음엔 매사에 판단하고 불평하는 모습을 가진 친구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이후 '왜 불평을 멈추지 않는 걸까?' 하며 나와 그들 사이에 선을 그었어요. 나는 다르고, 나는 그렇게 판단하며 불평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웬걸,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지만, 친구들을 판단하고 있었던 거죠. 저는 제가 현존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에 현존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읽고, 쓰면서 그 현존의 길이와 시간을 늘려보려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