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온전히 내맡기고 존재하기
붓다는 우리의 행복조차 ‘둑카’라고 가르쳤습니다. 둑카란 팔리어로 ‘고통’이나 ‘불만’을 의미합니다. 행복과 불행을 양극으로 분리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사실 하나입니다. 단지 시간의 환상이 그 둘을 분리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사물의 본성을 알아차림으로써 남은 여생 동안엔 환상을 좇지 말자는 것입니다. 당신이 더 이상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름다운 사물이나 조건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 정체성이나 영구성이나 만족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결국 좌절과 고통만을 안겨 줄 것입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죠.
당연히 좋은 일인 줄 알았던 것도 독이 되고, 누가 봐도 나쁜 상황이 오히려 더 큰 화를 막기도 합니다. 나쁜 일들을 겪으면서 큰 변화와 성장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합니다. 가져서 즐겁고 잃어서 슬프기를 반복하는 것은 에너지를 소모시킬 뿐입니다. 감정은 들고 나는 것, 내가 아니라는 톨레의 말처럼 계속 내 곁에 있지 않습니다.
사물과 조건은 당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지만 기쁨은 줄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당신에게 기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기쁨이란 아무런 원인 없이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즐거워지는 것.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조건이 충족될 때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만드는 것,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 기쁨이라 생각됩니다. 이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힘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이것이 마음을 먹기만 하면 생긴다니, 나는 앉은 자리에서도 억만장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척'을 한다고 해서 기뻐지진 않습니다. 억지로 웃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따져 묻기를 멈추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톨레는 "불행한 꽃을, 스트레스를 받는 떡갈나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우울한 돌고래, 자존심이 상한 개구리, 편하게 쉴 줄 모르는 고양이, 증오와 원망을 품은 새를 만난 적이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동식물들을 지켜보면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지금 여기’에 온전히 내맡기는 법을 배우십시오. ‘존재’를 배우십시오. 하나가 되는 법을,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참되게 존재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한 완전함을 배우십시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어떻게 삶과 죽음을 문제 삼지 않는지를 배우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서 '존재'를 배우라 말합니다. 물론 동물들처럼 배고프면 먹고, 졸릴 때 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긴 아닐 겁니다. 고민하고, 걱정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주변에 부정적 감정을 전달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저 원하는 것을 하면 되는데, 어떻게 잘할지 고민하다가 일을 그르친 적이 많습니다. 집중하지 못해 늦은 시각까지 일하다 실수하기도 하고, 더 잘하려고 고민만 하다가 정작 데드라인을 놓친 적도 있지요. 하지만 동물들처럼 고민 없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 다시 한번 되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