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끝이 아닌 사유의 시작
보슬비가 한 번만 내려도
풀은 더한층 짙은 초록빛을 띤다.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한 줄기 비가 잎사귀에 스며드는 순간을 떠올리며, 비를 흠뻑 머금은 숲이 더 푸르고 생생해지는 그 기운을 느껴보려 했다. 소로는 단지 풀과 비와 나무의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잎이 초록의 에너지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비를 받아들여야 하듯, 나 또한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각과 바람이 내 안 깊숙이 스며들어 나를 자라게 해야 한다.
《월든》을 처음 펼쳤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한 자연 에세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숲 속의 오두막, 고요한 호수, 새소리, 그리고 사색.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나는 압도되었다. 소로의 문장은 단순한 자연의 기록이 아니라, 마치 그가 직접 나무의 세포를 들여다보듯 세밀했고, 그의 관찰은 인간의 시선을 훌쩍 넘어 우주의 차원으로 이어졌다.
왜 이렇게까지
자세히 쓰는 걸까?
나는 《월든》을 읽으며 여러 번 길을 잃었다. 어떤 문장은 너무 단단해서 쉽게 의미를 파고들 수 없었고, 어떤 장면은 너무 느리게 흘러가서 한 문단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소로는 삶을 단순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으로 존재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언어로, 자연조차 넘어선 어떤 우주적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나의 작은 세계와 얕은 사고를 마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완독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완성’보다 ‘순례’에 가까운 뜻으로 다가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다 읽었다는 것은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존재의 뿌리를 더듬으며 쓴 기록을 끝까지 따라 걸었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 길은 쉽지 않았지만, 숲을 헤매며 길을 잃고, 다시 발자국을 찾는 일 자체가 이미 이 책의 본질이었다.
무엇보다 혼자였다면 끝까지 가지 못했을 것이다.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와 함께 읽고, 각자의 속도로 감상을 나누는 그 과정이 나를 끝까지 붙잡아 주었다. 어떤 날은 한 문장에 멈춰서 서로의 해석을 들었고, 어떤 날은 그저 ‘읽기 힘들다’는 한마디로 마음이 통했다. 질문들이 모여 나의 이해를 조금씩 열어주었고, 서로의 해석이 겹치고 어긋나는 지점에서 나는 비로소 《월든》을 조금 더 깊이, 그리고 조금 더 너그러이 읽을 수 있었다.
책을 덮고 나니, 마음 한편이 조용했다. 숲의 소리가 아니라, 내 안의 소리였다. 《월든》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 책’이 아니라, ‘나를 더 큰 세계로 데려간 책’이었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 순간, 삶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결백하다는 그의 단호하고 고요한 믿음이 오래 남았다.
이제 나는 안다. 완독이란 ‘이해의 끝’이 아니라 ‘사유의 시작’이라는 것을. 월든의 숲은 책 속에 있지 않다. 그 숲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머물러 있다.
[표지 사진: Unsplash의 Coleman Gl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