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좋은 상사를 소개합니다
좋은 상사란 마치 전설 속의 동물과도 같다. 모양과 형태는 전해져내려 오는데 존재하는지 도통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전생에 덕을 쌓은 것일지, 전설 속의 동물을 나는 만났다. 이 글은 내가 만난 좋은 상사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문과도 같다.
이른바 회색분자 혹은 엑스맨으로 대기업에서의 삶을 꾸역꾸역 적응해온 나는 사실 조용한 일탈을 감행하면서 나의 본성을 지켜왔다. 그중 하나는 출근 전 (당시 직장이 여의도에 위치해 있었는데) 회사 근처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것이었다. 왜 '그네'였는지는 모르겠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입사원 시절에는 특히나 조직문화가 갑갑하게 느껴졌었고, 그네라도 마음껏 타고나서 회사에 들어가야만 하루를 버틸 힘이 생겼었던 것 같다. 당시 유관 부서에서 근무했었던 그는 출근길 우연히 그네 타는 옆 팀 신입사원을 발견했고, 그 모습이 좋았다고(?) 훗날에야 이야기해주었다. 그 모습이 좋았다니, 그도 이상하기는 나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몇 년이 지난 후 몇 번의 조직 이동으로 그와 나는 한 팀에서 팀장과 조직원으로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나는 어렴풋이 그가 좋은 상사라고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함께 일하면서 명확하게 그의 장점들을 다시 알게 되었다. 나의 아저씨 말고, 나의 팀장님을 통해 살펴보는 좋은 상사의 특징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A. 개인을 존중한다.
그는 사실 개인주의자다. 본인의 본성을 존중받고 싶어 하며, 그렇기에 조직원들의 본성도 존중한다. 본인 팀의 직원이 회사에서는 과장이나 대리 일지 몰라도, 사실은 누군가의 와이프라거나(개인사 존중) 아니면 알고 보니 까칠하거나 혹은 여유 부리는 스타일(개인 성격 존중)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 말 그대로 존중이다.
B. 조직 관리에 능하다.
그는 관리자의 역할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조직의 '장'으로서 각 조직원들의 업무적 장단점, 비업무적 장단점을 매우 잘 파악하고 있다. 조직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함께 비전을 수립하고, 조직원도 성장하고 회사도 성장할 수 있도록 업무를 배당한다. right time까지는 아니어도 right place라고 느끼게끔 해준달까.
C. 실무자에게 자율과 권한을 준다.
사실 '대리'같은 팀장이 얼마나 많은가. 그는 실무는 실무자에게 자율과 권한을 충분히 주고 믿고 맡긴다. 믿어주는 사람에게는 보답하고 싶어 지기 때문에 실무자는 더더욱 스스로 motivated 되고 이는 성과로 이어진다. 선순환 구조다.
D. 함께 일하는 과정이 매우 납득이 간다.
일은 결과만큼 과정도 중요하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직장 생활은 버틸 만 하지만, 과정이 항상 좋지 않다면 직장 생활은 너무 피곤해진다. 그와 일할 때에는 불필요하거나 소모적인 절차가 없다. 보고는 간단한 양식으로 대체되기 때문에, 팀장 보고를 위해 장표를 수십 번 고치는 짜치는 과정이 절대 없다. 보고 시에는 의사 결정이 비교적 명확하고 빠르다. 일하는 과정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것이 즐겁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E. 일과 휴식의 밸런스를 스스로 잘 지킨다.
그는 땡땡이를 잘 치는 사람이었는데, 이 점도 나와 꼭 닮아 있었다. 일할 때는 몰입하고 성과를 내되, 일하지 않을 때에는 본인 스스로 리프레시를 하러 땡땡이를 치든 휴가를 내든 참 잘 노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때론 땡땡이, 혹은 단기 여행, 가끔 장기 여행을 통해서 한 숨 돌려야 직장 생활을 간신히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이라 그와 나는 그런 부분도 비슷했다. 사실 잘 노는 관리자는 드물어서, 그래서 더 내 팀장인 것이 감사했다.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다고들 하는데, 나는 나의 팀장님을 떠나기 전에도 이미 그가 좋은 상사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조직을 떠나 새로운 회사로 옮기게 되었지만, 나의 팀장님을 떠난 것이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아직도 퀘스천 마크다. 이제는 정말 전설 속의 동물처럼 아득해진 나의 팀장님. 새 직장에서도 한 번 더 이런 분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역시 욕심이라고, 나를 다독이며 내일도 출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