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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Jan 06. 2023

정지현:해킹된 사물의 병치술

- 정지현의 외계적 조립법/해체법에 따라, 2022 금천예술공장 평론

해킹된 사물의 병치술(術)

정지현의 외계적 조립법/해체법에 따라

 


글 조주리 



작가 정지현이 조립해 놓은 사물의 자태에는 천연덕스러운 데가 있다. 자연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는데도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조립 방식, 최저가 검색으로 며칠 내로 조달 가능할 것 같은 재료와 부품, 전시가 끝난 이후 어느 구석에서 다시 만날 것 같은 인상이 그렇다. 그러나 실상은 어디에도 없는 사물의 몽타주다. 조립하는 법을 배운 적 없는 누군가가 정성껏 만들어 놓은 듯한 작품의 ‘외계적’ 완성도는 혼란함을 준다. 나아가, 우리가 ‘작업’이라고 명명하는 대상에 대한 감상법을 망각하게 만든다. “사물적인 조각”과 “조각적인 사물” 그 사이에서 배회하는 일련의 작업을 조형적 시도로 바라봐야 할지, 조각적 실험을 경유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그저 신기한 발명품으로 간주해야 할지 혼선이 생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속시원한 명명보다 갈급한 일은 작업의 기원에, 작가도 인지하지 못할 어떤 이유에 다가서기 위한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2022년의 작업 목록과 서사 안에서 말이다.   


‘핵(Hack)’, 작품 제작에 대한 태도와 방식을 살핌에 있어 처음 떠오른 이 단어가 나에게는 작업을 여는 열쇠다. 작가의 공식 설명을 그대로 수긍하기에 앞서 엿보는 정지현의 작업 방식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평범함 사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핵’은 훔치거나 훼방하다 등 부정적 함의가 있는 단어지만, 용례적 의미는 기계 구조나 사물, 시스템을 분해해 그것의 구조와 작동원리를 이해하고 새로운 구조와 쓰임을 창조해 내는 것에 있다. 기성품 형태로 구입할 수 있는 생활 가구, 운동 기구, 각종 거치대, 조명기를 비롯하여 직관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어떤 이에게는 꽤 요긴할 수 있는 신종 물품들을 생경하게 조합하는 DIY 제작 방식이 이와 같다. 일반적으로 오픈 소스를 다루는 해커들이 대상에 대한 분석과 분해에 집중하는 과정을 거쳐 점차 새로운 형태와 기능을 창안하고, 최종적으로 자기만의 미적 논리에 따라 독자적인 제작과 개발을 이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기성품을 ‘어셈블링(Assembling)’하여 레디-메이드 오브제로 활용하는 정지현의 조각적 방법론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20세기 초부터 이어져 온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자들의 유산이기도 하다. 19세기 시인 로트레아몽(Comte de Lautréamont)의 산문시 ‘말도로르의 노래’에 등장하는 상징적 구절 ‘해부대 위의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과 같은 병치술(術)이 과거 초현실주의자들이 꿈꾸었던 문예 미학의 핵심 방법론이었다면, 오늘날 미술 작가의 일은 ‘발작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사물의 병치(Juxtaposition)를 넘어서, 존재와 사물에 대한 적극적 해킹과 디자인적 조합을 통해 탈-미술적 조형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진단할 수 있다. ‘과정상의 우연’과 ‘결과적인 아름다움’은 정지현의 작업이 매달리는 목표와 거리가 있지만, 스스로의 조형 실천으로부터 초월적 가치와 형태의 당위를 전제하지 않는 점, 같은 논리로 작품과 사물 간의 위계를 밋밋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조형 작업과 뚜렷한 차이가 발생한다.


한편, 정지현이 조립하고 해체하여 생성한 일련의 작업은 즉각적인 ‘심리적’ 반응을 촉발한다. 몸과 맞닿은, 혹은 신체와 연결되는 장치의 양감과 구조, 실루엣에 대한 이물감은 다양한 척도로 나타난다. 예민한 사람이 보기에 매우 불편한, 보통의 사람이 보기엔 살짝 불편한, 둔한 사람이 느끼기에 문제없는 수준의 감도 차이라고 할까. 이와 같은 불편한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정지현의 작품들은 신체를 환기시킨다. 누군가가 눕고, 앉고, 걸치고, 기대고, 응시했던 자리에 감도는 서늘함 앞에서 ‘언캐니(Uncanny)’라는 고전적 프로이트식 용어를 소환해 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당도한 것들은 기이하다. ‘지금, 여기’에서 실재하는 존재의 안온함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앙상한 발목만 내놓은 채 번뜩이며 검은색 천을 수의처럼 두르고 있는 거대한 덩어리들도, 안마 의자인지 게임 의자인지 수술 의자인지 도통 분간이 되지 않는 저 철제 기구들까지도 말이다. 이들은 활물(活物)적인 것과 생명이 꺼진 것, 본체와 부품, 증식된 것과 은폐된 것이 구분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째서, 작가는 이토록 언캐니한 덩어리를 만드는 일에 골몰하게 된 것일까. 


정지현의 작업은 디지털 디바이스와 신체와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 경험과 자발적 탐구에서 시작되었다. 입체를 다루는 작가로서 자신의 몸과 직접 접촉하는 인터페이스인 스마트폰과 랩톱, 각종 전자장치에 대한 연결 감각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 사이에서 생성되는 독특한 형태적, 공간적 게슈탈트(Gestalt)에 집중한 것이다. 작가의 발견처럼, 전원과 와이파이가 확보된 상태에서 신체와 디지털 기기, 그리고 그 사이를 물리적으로 매개하는 주변 기기는 마치 하나의 몸체처럼 이어져 데이터를 송·수신하는 유기적 덩어리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서로 차단된 상태의 숙주처럼 무감각한 송장(Corpse) 같기도 하다. ‘먹방’을 보며 식사를 하고, ‘런데이(Runday)’와 같은 달리기 앱의 지시를 받아 인터벌과 호흡을 조절하는 등의 아날로그 바디와 디지털 컨텐츠 사이의 강력한 ‘동기화(Synchronization)’를 생각해 보면 동의할만한 쟁점이 아닐 수 없다.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전자 장비와 밀착된 세대인 ‘밀레니얼’ 작가로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문제화 과정과 조형적 대응은 최근 전개된 정지현 작업의 핵심이 되었다. 여러 형태의 전기, 전자 장비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물과 생활 기기가 혼성적으로 결합된 방식은 디자인된 공간에 반응하는 주체의 신체적 반응과 인지 상황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비어있는 세트’이자, 그 자체로 연극적인 조각의 특질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신체가 빠져나간 조각적 공간 속에 사람들이 투영하는 감각과 상황은 어떤 것일까. 작가가 호소했던 전자 기기 과잉 의존과 그로 인한 고립의 감각일지, 그와는 다른 차원의 정서적 밀착감일지, 혹은 기계와 맺는 무의식적 성애와 상호유희의 감각일지. 그것은 우리가 작품과 갖는 심리적 거리감에 따라, 그리고 각자가 작품에 투사하는 경험과 인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작가는 무엇을 해킹하려고 했던 걸까. 부지불식간에 온갖 기계장치와 한 몸이 된 나른한 경험과 전자 기기가 빠져나간 자리에서 안도감이 아닌 공포와 무력을 느꼈던 순간, 혹은 사람 아닌 사물과 기기가 지배하는 실내의 정경은 아니었을까. 사물의 풍경이 우리의 초상이 되는 동안, 하나 둘 익숙해진 감각을 지워내고, 불안한 것들을 겹쳐보고, 사물의 시작점과 몸의 끝자락을 이리저리 접합해 본다. 불길한 상상 속에서 세계를 외연을, 우리의 내면을 해킹해 본다. 정지현의 조립법과 해체법을 교본삼아.   







Images from Jung Jihyun (artist) 

@jhjung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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