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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라 Nov 08. 2019

큰일 났다. 며느리가 되었다.  1

고슴도치 며느리가 되기 전 고슴도치 딸의 이야기



큰일 났다. 며느리가 되었다.

사랑이 가득한 가족 속에서 화목함과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내가 결혼을 해버렸다.




 

나는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곧 서른인 아들을 아직도 내 사랑, 내 새끼라 우쭈쭈 하며 엉덩이를 토닥이는, 어릴 적 남동생과 뭘 먹을 때마다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독사 같이 눈을 벌겋게 부라리는 년이라 나를 욕하던 엄마와 가부장적인 캐릭터로는 어디 가도 지지 않을, 내 10대 시절을 자살충동으로 물들인, 폭력적인 주사를 가지고 있으며 평생 집에 생활비라고는 가져오지 않던 아빠가 있는 집에서 자랐다.


 남편은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머지않아 마흔이지만 아직도 아이고 이뻐, 오구오구 우쭈쭈를 온몸으로 받는 마치 내 동생과 같은 삶을 산 사람이다. 결혼식 사진에도 친정 부모님, 신랑 신부, 시부모님 2:2:2로 찍는 사진에 시모께서 남편에게 딱 붙어 2:3:1로 찍혔고, 양가 부모님이 사위와 며느리를 안아주는 순서에서 시모께서는 내가 아닌 본인의 아들을 끌어안고 엉덩이를 두드리며 아구 예뻐~를 외쳤다.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우울하다가도 웃음이 터진다.




 얼마 전에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에서 김지영의 언니의 캐릭터가 남 같지 않았다. 나는 그 정도로 똑 부러지고 당차진 못했지만 그런 마음을 늘 가지고 자랐다. 어딜 가든 아들을 물고 빠는 엄마와 약간 떨어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구석을 서성이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친가도 외가도 모두 알고 있었다. 내 부모의 지나친 아들 편애. 모두들 그 얘기를 장난처럼 진심을 담아 엄마에게 얘기했지만 정작 엄마는 인정하지 않았다. 먼지떨이와 파리채가 부러질 때까지 맞고 자랐고, 평생 편애를 당하며 자랐고, 생활비 하나 주지 않으면서 늘 목소리를 키우며 가족을 후려잡으며 집안일이라곤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빠를 보며 자랐고, 제발 아빠에게서 도망갔으면 좋겠는데 아들 사랑에 이혼하지 못하고 아빠를 닮았다며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버틴 엄마를 보며 자랐고, 술에 취해 정말 가족을 죽일 것 같은 공포감에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지만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해 인간세상에 대한 믿음이나 사람에게 의지하는 법을 어린 나이에 상실해버린, 80년대 배경 아침드라마에서나 볼 것 같은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런 집에서 그런 위치로 살면서 아직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겁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별나다 고집스럽다 라는 소리를 평생 들으면서도 드세게 나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시작은 고2쯤이었다.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와 남동생과 아침을 먹다가 엄마의 어떤 차별적인 말에 나는 결국 머리가 터지고 말았다.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기 직전인데 밥을 앞에 두고 큰 소리로 뭐라고 말을 하며 미친 듯이 광광 울었다. 난생처음이었던 것 같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나는 갓난아기 때부터 온순하고 울지 않는 존재감 없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날 그 아침밥 앞에서 평생의 한을 다 토해내듯 미친 듯이 울던 나는 잠시 후에 조금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평소 같으면 엄마가 내 머리채를 쥐고 식탁에서 나를 끌어내려 온 집안을 끌고 다니며 밟고 때려야 하는데 엄마도 동생도 아무 말도 안 하고 나를 지켜봤다. 엄마는 화를 내거나 비아냥거리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며 울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왜 나한테만"이라는 말이 들어갔던 것 같다. 그때가 분기점이었다. 엄마의 폭력이 멈췄고, 남동생이 나를 어려워하기 시작했고, 온순하고 내성적인 어린아이였던 나는 고집스럽고 드센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어떻게 죽어야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나는 누구도 나를 괴롭히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눈치를 받으며 자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눈치가 빠르듯이 나는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더 쿨한 척을 했고, 나를 괴롭히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더 센 척을 했다. 너무 어릴 때부터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기 때문에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그래서 학창시절 외적으로는 교실에 있어도 안 보일 것 같은 순진무구한 시골소녀 같은 모습을 하고서 나를 괴롭히거나 부당한 것을 시키는 일명 노는 아이들에겐 한 번도 꺾인 적이 없다. 어떤 날라리는 내가 자기 말을 무시하자 자존심에 과하게 스크래치가 났는지 자기 책상을 뒤엎고 의자를 던지며 울면서 표효를 했다. 그 정도로 나는 겉으론 세상 만만한 학생 캐릭터의 형상을 했었지만 속엔 가시가 오천 개는 박혀 피 흘리고 있는 무서울 게 없는 고슴도치였다. 심적으로는 우울하지만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고, 보통의 아이들에겐 그냥 조용한 친구로, 센 아이들에게는 밟히느니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부딪쳤다.




 20대 후반이 되면서 나는 유한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습관적으로 센 척을 하는 일이 버거웠고,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센 사람으로 만드는 주변인들을 하나 둘 정리했다. 나의 센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늘 그 모습이 내가 아니라고 느꼈다. 나는 학창 시절 12년 모두 생활기록부에 '내향적이고 온순한'이 쓰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센 모습의 나는 내가 만든 생존캐릭터일 뿐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내가 만든 캐릭터에서 진짜 나의 모습을 찾아가려고 할 때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나이만 먹었지 너무 투명하게 아이 같아서 신기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신기하게도 초반부터 너무 솔직하게 서로의 치부를 드러냈다. 나는 나의 단점과 괴로움을 다 털어놨고, 그도 자신의 상처를 얘기했다. 기대가 실망이 되면서 상처를 만드는 게 싫었다. 모두가 다 자기방어기제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환경에서 자랐고,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이런 상태니까 싫으면 다가오지 말라는 직설적인 경고였다. 우리는 그렇게 시원하게 다 까고 어설픈 연애를 시작했고 햇수로 6년 만에 결혼을 했다.


평생 플랜에 결혼이 없던 나와 시작부터 결혼을 얘기하던 그와의 결혼 준비는 생각보다 간단했지만, 생각보다 괴로웠다. 너무 다른 환경에서 너무 다른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가진 것 없지만 독립적인 성격의 나와 평생 부족하지 않게 살아왔지만 여전히 캥거루 새끼인 그와의 결혼은 토네이도가 휩쓸고 가듯이 진행되었고 1년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그렇게 어찌 됐든 결혼식이 끝났고 이제 거의 한 달이 되어간다.

여행에 다녀와서 양가를 거쳐 신혼집에 도착한 건 이제 3주 정도 되었다.




 우리는 결혼 전부터 서로의 역할과 경제적인 플랜, 각자의 인생관, 양가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괴롭기 싫었고, 참으며 버티며 사는 삶을 살기 싫었고, 누군가의 누가 되는 것과는 별개로 가장 1순위에 나의 삶을 두고 싶었고, 가장 크게는 어릴 적 우리 집 같은 가족은 만들기 싫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고, 아빠 같은 사람과는 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내 안에 아주 크게 자리 잡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처음부터 해야만 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싸우듯 살아온 삶에, 사랑받고 자란 사람을 억지로 끼워 넣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도피처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괴로운 삶에서 돌파구가 되어주겠다고도 했다. 나는 의존하는 법을 잘 몰라서 그를 만나는 동안도 내내 괴로워했고, 많이 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거기서 꺼내 주겠다고 했고, 우리는 행복할 거라고 했다. 자기는 이런이런 사람이고, 이런 환경에서 자랐고,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며 우리 집과는 다른 가족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정적이며 다정하고 배려있는 남편이 될 거라고 했다.

아직 뭐라 말할 수 없는 단계이긴 하지만 그는 그의 말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불안했던 문제 하나가 현실화되었다.




고슴도치와 캥거루 새끼의 결혼생활에 어미 캥거루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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