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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석원 Sep 10. 2023

다른 사람의 꿈에 함께하는 것

환상에 싸움을 걸 배짱도 없는 병아리가 해적을 논 하는 게 아니다

2020년 일이다. 가까운 친구가 등록금 문제로 대학원 진학을 망설이고 있었다. 나와 분야는 다르지만 나보다 훨씬 똑똑한 친구이고 가고자 하는 방향과 성향에 비춰봤을 때 대학원은 그에게 아주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쉽게 결정 내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집이 여유롭지 않아 성인이 된 이후부터 생활비를 직접 벌어 생활해 오던 중이고, 부양가족까지 있어하던 일을 정리하고 대학원에 집중하는 건 어려운 선택이었다. 얼마의 여유 자금이 있어야 대학원을 선택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대략 2년의 생활비에 해당하는 2-3천만 원 정도의 금액이었다. 당시 내 전 재산이 정확히 3천만 원 정도 있었는데, 무슨 기분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3천만 원을 약속했다. 채무관계를 원한 건 당연히 아니었고, 이 일로 나와 이 친구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기를 원한 건 아니었기에, 다음 해 친구는 대학원에 합격하고 나는 약속한 3천만 원을 일시불로 보내줬다. 


사실 나는 소비욕이 크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용돈을 모아 사고 싶은 물건이나 받고 싶은 선물이 딱히 없었다. 개발을 배운 이후에는 다양한 외주 개발로 풍족한 대학 생활을 했지만 역시나 소비에 큰 로망은 없었다. 짠돌이처럼 돈을 아끼는 건 아니었지만 쓰고 싶은 만큼 써도 가진 돈으로 충분했고, 돈이 많으나 적으나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생활을 30살이 된 지금도 유지 중이다. 운전면허가 없을 정도로 차에 관심이 없고, 집을 소유한다는 건 여전히 와닿지 않는 일이다. 물론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내서 그런 걸 테지만, 나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도 부족함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허무주의에 빠져 세상 모든 일과 성공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이루고 싶은 일, 하고 싶은 일에 외제 차와 좋은 집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돈을 경시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돈은 시장에서 평가된 내 행동의 가치이니, 나름 성장의 지표이자 뿌듯함을 주는 원천이기도 하다. 다만 행동의 결과로써 가치가 있을 뿐, 존재 자체가 나의 깊은 만족감을 채워주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80억 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는 부자인 사람, 가난한 사람, 성공한 사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숱하게 발에 치는 저 사람들 중에서 나를 구분할 수 있는 아주 아주 사소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에 있다. 그 사소한 차이를 다른 말로 꿈이라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그 3천만 원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소비였다. 태어나서 써 본 가장 큰 금액의 소비였지만 반대로 가장 만족스러운 소비였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에 약간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어떤 관객보다 가까이서 그 사람의 인생을 구경할 수 있는 조연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 주는 고마움 때문이다. 또한 내 삶의 범위가 확대되는 사건이었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한 번 더 있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창업한 형이 연락이 왔다. 새로운 회사가 자리 잡기 쉽지 않은 분야이다 보니 어려움이 많은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엔터 분야에 무지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작년에 처음 사업을 구상하면서 나한테 한 시간 넘게 떠들던 그 형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똑똑한 사람이 자기 인생을 걸고 뭔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설사 실패하더라도 그 시도 자체로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멋진 일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초대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가 61억 KM 밖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을 부르는 명칭이다. 사진 속 지구는 0.12 화소에 불과하다. 이 거대한 우주에서 아무런 가치 없는 존재인 우리에게 가치를 불어넣는 건 거대한 담론이 아닌, 역설적으로 우리 안의 작은 동력이다. 그렇기에 꿈을 꾸는 삶이 아름답고, 꿈을 이뤄가는 한 사람의 인생을 함께하는 것도 행복한 일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원피스 명대사로 글을 마무리해보자.


환상에 싸움을 걸 배짱도 없는 병아리가 해적을 논 하는 게 아니다
- 몽블랑 크리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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