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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04. 2024

차라리 모든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

<듄: 파트2>(2024)


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고 싶다. 일반적으로 위기라는 말은 예정된 파국 앞에 서 있는 상황, 혹은 도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이를 따라 ‘위기의식’은 자신이 그러한 위기에 놓였음을 감지하는 능력으로 정의되며, 이때 ‘감지’란 어떠한 징후를 표면화하는 일을 가리킨다. 문제는 이러한 징후는 무색무취의 형태를 띠기에 마땅히 지적되거나 특정되거나 하지 않으며, 이를 따라 ‘위기’란 전방위적인 무언가로만 인식된다는 점이다(조르주 디디-위베르만). 가령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징후와 세기>는 냄새의 형식을 빌려 스크린의 안팎을 넘나들고, 이를 따라 영화사와 태국 사회의 한 세기를 혼합해 보여주었다. 이러한 병치는 영화와 현실 중 어느 하나에 우위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병렬 몽타주가 되지 않으며 따라서 파급되는 효력 또한 없다. 영화가 현실의 인상으로 작업한다고 한들 그러한 현실 자체가 영화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보여주는 징후란 것은 확실해서, 이러한 수평 관계에서도 파국의 잔향만큼은 선명했다. 사실상 이러한 병치가 낳는 것은 “저 너머에 무언가 있고, 어쩌면 우리의 삶은 저곳에 근간했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다. 즉, 영화에서 위기란 “차이에 포섭되는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기의식이란 마치 반딧불의 명멸과도 같은 것일 테다. 예정된 파국을 바라보는 처지로 자신을 상대화하는 게 위기의식이라면, 위기란 우리 삶의 본연적인 장소이며 그러한 장소로 돌아가고자 구조신호를 보내는 게 바로 우리일 테니 말이다. 물론 이것이 위기를 즐긴다거나 하는 식의 외줄타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생각해보고 싶은 건 영화가 위기가 될 때 우리의 삶이 영화로 돌아가려는 이유다. 왜 우리는 삶이 위기에 처할 때가 아니라 영화가 위기에 처했을 때를 말할까? 개개인의 위기를 도표로 작성하기엔 너무 많은 지면이 요구되어서일까? 사실 영화는 어떠한 징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시대의식이라던가 하는 공통분모를 지적하기에 수월하다. ‘개인’이 그러한 시대에 온전히 포섭된다고 말하는 일은 무리가 있지만, ‘개인’이 그러한 영화를 보며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고 보는 일은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시대에 포섭되는 일과 삶을 떠올리는 일은 얼추 비슷해 보이나, 영화를 현실의 증상으로 보느냐 징후로 보느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영화가 내비치는 위기를 두고서 이를 의식으로 표면화하는 게 삶이라고 여길 때, 영화는 진정 위기를 말하는 매체가 된다. 


드니 빌뇌브의 <듄: 파트2>에서는 행성 아라카스를 둘러싼 전운을 두고서 “‘전쟁의 징후’가 감돌고 있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반지의 제왕’과 마찬가지로 여태껏 영화화된 <듄>의 판본은 행성 아라카스를 둘러싼 자원전쟁이었다. 이러한 자원전쟁은 소설이 최초로 작성된 1960년대에도 그렇지만, 석유를 둘러싼 중동전쟁이 끝끝내 2000년대 미국의 이라크전으로 이어졌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파국이 되었다.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그러한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세계에 전파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는데 왜냐하면 이는 핵미사일에서 시작된 행성 단위의 파국이 진정으로 도래하였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빌뇌브의 <듄>을 <아바타>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이러한 행성 단위의 파국이 일종의 시대정신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행성 시대의 기후변화가 우리에게 파국의 연쇄를 그래픽화하는 한편, 행성 시대의 영화는 특정한 지역으로서 상영되는 게 아니라 전지구적인 현상으로 상연된다. 즉 21세기의 영화가 ‘위기’로 이해되는 일은 그러한 점에서 행성에 상대화하는 위기의식이라고도 볼 수 있겠고, 바꾸어 말해 이는 우리 세계가 점점 더 ‘행성’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주에로 의식을 확장하는 일에서, 우리가 사는 이곳이 유일한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로의 전회 말이다. 


이제 허블 우주 망원경의 업적은 정밀타격을 위한 탄도계산 시스템의 항공관제실로 이양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이었던 영화는 세계를 향한 유일한 문을 닫아걸고서 최후의 환상을 즐긴다. 행성 시대의 영화는 그 자신이 최후의 안식처가 될 것을 염려하면서, 영화가 대피소로 인식되는 일은 그 자신이 환상을 내포해서가 아니라 세계가 끝없이 펼쳐지는 환상 더미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거에 영화가 현실에 초과한 환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스펙터클, 구획을 재분배하는 거대 폭탄이었다면 영토가 해체되고 구획이 분배를 거치는 요즘 영화의 스펙터클은 영화와의 강한 얽힘이라는 점에서 운명론의 일종이거나 새로운 공동체 의식의 발현을 뜻하는 것 같다. 영화는 점점 더 평평해지는 화면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대두하는 것은 지평선을 바라보는 감각, 즉 ‘수평’에서 ‘구체’를 연상하는 능력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듄>의 아라카스에서 실재의 사막을 연상하는 일은 행성 시대의 영화가 어떻게 공동체의 질서를 산출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이 될 수 있어보인다.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연상케 하는 이 사막에서는, 이야기의 무대가 우주로 확장되더라도 그걸 받아들이는 의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지평선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지평선은 주체의 한계이면서 반향되는 세계의 최전선이기도 하다. 만약 위기가 도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킨다면 지평선 너머가 미지의 세계로 표상되는 것은 그러한 반향에서 주체의 위기를 느껴서일 테다. 즉, 주체의 존립 근거가 세계의 반향성에 의존할 때 지평선은 위기 의식을 징후로 발산한다. 그래서 <듄>의 시점에서 돌아보는 <2049>의 결말은 스펙터클에 대한 면역체계 교란이기보다 주체의 작은 역사에 더 가까워 보인다. <2049>는 모래 행성 안에서 자기의식의 기원과 내적 갈등을 포섭한 한 인물의 일대를 보여줬다. 이들 영화에서 행성은, 어떠한 사건이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흩어지는 곳이 아니라 이야기가 더는 도망치지 않도록 이들을 가둬놓는 장소에 더 가깝다. <스타워즈>의 방대한 이야기가 우주를 배경 삼지만 결국에는 스페이스 사무라이의 의협심에 근간하듯, 행성 시대의 영화는 거대한 세계관을 묘사하기보다 그러한 세계를 하나의 의식에 빗대어 주체의 입지를 위기 삼는다. 말하자면 행성 시대의 영화는 항상 위기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행성은 도망칠 곳이 없다는 점에서 위기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대피소이기도 하다. 적어도 영화에 주인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이들 영화란 스크린의 암막을 두고서 지평선으로 작업하는 셈이다. 


폴 비릴리오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발명된 엘리베이터가 계단의 지위를 주 출입구에서 비상구로 바꾸었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영화의 지위는 지난 100여 년간 대피소로 지위가 강등되었다. 영화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되어주던 때가 있었다면, 오늘날 극장은 더는 화사한 컬러를 독점하지 않으며 또한 짧은 뉴스릴을 전파하며 세계의 접합면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늘날 극장은 그저 예전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최전선이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영화는 세계의 최전선에 서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사실을 보여주는 매체가 아니며, 반대로 우리가 봐야 할 것을 극적으로 설파하는 매체도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감금의 역할, 동시다발적인 정보의 침투 가능성에서 자신을 스스로 배제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복제를 만들어내는 허구의 시대에 영화는 신체를 잃어버린 이들을 대신해 몸의 형태를 유지하게 해주는 항상성을 갖는다. 이전 시대에 영화가 ‘살아있던 것’으로서 유령의 길을 걸었다면, 오늘날에는 사물에 영혼이 깃들었다는 점에서 정령의 모습에 더 가깝다. 페촐트의 <운디네>와 같은 영화의 등장, 혹은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 같은 영화들에서 우리는 끝없이 무너지는 것들을 붙잡아보려는 시도를 느끼게 된다. 


<2049>의 기념비적인 결말은 어딘지 모르게 <듄>의 주인공이 겪는 시련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인다. 이들은 모래 폭풍 너머에 있는 진실을 찾아 나서지만, 이는 미리 예고된 사실이라는 점에서 파국 앞의 주체, ‘위기의식’으로서 형성된 자기 신체를 부여하는 첫 도입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행성 시대의 영화에서 중요한 건, 이들 주체에 정보의 진실성이나 정합성은 중요치 않다는 점이다. 여기에 필요한 건 위기를 행위자로 만들고자 부여되는 육체와 그에 따른 반향인 ‘의식’의 묘사이다. 행성 시대에 영화는 마치 지니의 요술램프처럼 위기를 보존하는 육신이 되고야 만 것일까. 영화는 현실에 밀려나 버려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을 최후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즉 영화는 폭격이 진행 중인 전쟁 세계의 방공호가 되었으며 다른 의미에서의 생존 수단으로 격하되었다. 어쩌면 영화는 이제 우리에게 더는 도망갈 곳이 없고, 바깥을 상상하기보다 골방에 틀어박히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영화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세계가 끝나는 일보다 자기 삶의 최후를 더 상상하는 일에 골몰할지도 모른다. 판데믹 시기에 반향된 OTT 서비스의 울림은 영화의 수요가 극장에서 바깥으로 이동했다는 점을 보여주기보다 차라리 모든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그리고 그 사이에 육체는 실존한다고) 믿게 해주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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