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것은 처음부터 잊어버리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 그래서 영화란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잊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계속 잊어가면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잊어버린 것. 즉, 마음의 보완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기록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까?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만, 간단하고 확실한 답은 죽음을 거부하도록 설계되어서라 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시체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게 설계되었다. 자연계의 여러 동인을 제외하더라도 시체는 무언가 멀리하거나,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인상을 준다. 영화도 비슷하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란 나머지 본능적으로 검은 화면에 거부감을 느낀다. 화면이 멈추거나 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하면 극장 측에 곧바로 사건을 보고하기도 한다. 단순히 들어간 돈만큼의 효용을 얻지 못했다고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를 본다는 건 시간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과도 같다. 앞으로 2시간 정도는 이곳의 풍경에 빠져있고 싶다는 이 마음이 바로 영화에 대한 한 가지 진술이다. 바꾸어 말해 몰입의 중단이나 시간의 탈구 같은 면에서 이런 진술이 가능하다. 영화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은, 현실에서 이탈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동안은 자신을 잊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자기의 상실은 무엇인가? 스스로를 ‘나’라고 정의하며 이를 타인에 소개할 수 있을 배치를 중단하는 일은, 일상을 잠시 떠난다는 점에서 마치 여행과도 같다. 일상에서는 학생이나 직장인 같은 정체성이 다중으로 산포하지만 영화에선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무엇도 아니게 된다는 점에서, 이런 일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건 그만큼 고유하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자신이 아닐 수 있을 권한을 획득한다. 단순히 다른 세계로 간다거나 하는 일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여러 숏이 연달아 진행된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보기 위해 좀 전의 장면을 잊어야만 한다. 여기서 틈새가 발생하고 다시금 차이가 무언가를 생성하는 게 바로 영화다. 결국 영화란 무언가를 ‘잊는다’는 점에서 슬픔을 간직하지만,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진취적인 매체다. 이 양가성이 영화를 두고서 인간을 회복으로 이끄는 ‘징표’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가 정해진 시간을 두고 작업한다는 점에서 이런 회복의 과정은 필연으로 중단된다. 흔히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도중에 중단하면 비가역적인 손상을 겪는 몇몇 사례가 있듯, 그런 점에서 영화에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회복의 주체로서의 ‘나’가 없을 때 그 자리에서 ‘나’는 중단을 겪고 붕괴하고야 만다. 결과적으로 이 중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가 심리치료의 관점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자기를 잊는 것과 견디는 것, 이 둘 사이에 영화의 문제가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제시한 건 이런 부류의 문제였다. 마음을 보완하는 것은 자신을 허무는 것과 사람들 사이에 부딪히는 것, 둘 중 하나였다. 작품이 묘사하는 세계는 한 사건을 두고서 불가항력인 미래로 받아들이고 있고, 또 실제로 세계가 망가지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인간의 굴레처럼, 여기서 자아는 고통을 말하는 방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세계는 자신이고자 고통을 끌어안을 것이다. 흔히 무언가를 끌어안을 때는 ‘나’가 대상의 바깥에 자리하게 되므로 자리를 ‘나선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를 따른다면 영화는 극장을 나설 때가 그런 순간이 된다. ‘시작된다’는 시동의 감각은 어떤 것들의 사이에서 자신이 발견되는 감각을 뜻한다. 막연히 세계를 감내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런 고통을 감각하며 마주하는 존재로의 ‘나’를 발견하는 일 말이다. 신체는 상처를 감당하는 장소이기 전에 우리가 감각에 무뎌지는 경험을 제공한다. 즉 한 존재로서의 삶을 잊는 곳이기도 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잊는 곳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자극에 익숙해지면 그게 일상이 되듯 어떤 면에서 우리는 영화로서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실천으로서의 영화라는 말이 더 평범해 보이지만, 도치된 판본도 나쁘지 않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에게 반복의 차단도 한 세계에 연결되는 데 필요한 ‘조처’임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는 숏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자 많은 기술을 사용하는데 만약 숏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그걸 두고서 화면이 ‘튄다’고 표현한다. 이는 단순히 한 숏 앞에 멈춰 서는 것과는 다른 문제여서, 무언가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으면 우리는 이를 배제하면서 한 세계를 유지하려 시도한다. ‘지킨다’는 건 ‘단속한다’는 것과는 달라서, 오히려 한 세계를 닫힘에 두고자 한다면 그와 같은 튐을 배제해야 할 이유가 있다. 우리가 지켜내려는 건 ‘자기’이지 영화가 아니다. 우리가 끌어안는다면 밖으로 나서기 위함이지 그를 구원하려 함이 아니다.
영화를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순간으로 파악하는 일은 자리를 나설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을 잊는 게 고통을 잊는 방법이라면 잊는다는 것은 결국 한순간을 간직하는 법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무언가를 잊는다는 것은 이를 뜻한다. 인간이 한 세계에서 몇몇 특징적인 쇼트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영화를 기념하는 일이 회복을 말하는 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고통의 당사자가 되는 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함이 아니라 자아를 감각함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오즈의 영화는 고통을 말하는 법을 떠올리게 한다. 삶의 한 순간을 추모하는 일은 도리어 조각내는 점에서 자아의 외부가 고통에 둘러싸여 있음을 상기시킨다. 일컫자면, 이 세계가 고통이라면 그와 같은 숏은 서로를 향한 거리두기이며 영화에서 ‘차이’는 스크린에 한 숏을 ‘던진다’. 적절한 수준의 고통이 있어야만 ‘나’란 존재가 완성된다면 여기서 숏은 아름다운 환대이기보다 무대를 등지는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에서 잊어도 되는 것은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비가시적인 이미지로의 변화를 억압으로 규정한다. 이야기를 잊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현실에 풀려나게 된다는 이 관점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바깥’을 두고서 아직 말해야 할 것이 있는 상태로 바라봄으로써 그가 영화를 끌어안을 만한 계기를 마련한다. 특히 하스미의 오즈론은 오즈를 ‘일본적’이라는 말에서 분리하는데, 여기서 ‘일본적’인 것은 영화의 내피로서 오즈의 영화가 끌어안은 고통으로 사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서구적인 것에 반발하거나 영화의 가치를 회복하려 든다는 뜻이 아니라, 항상성의 체계로 의식되어왔던 오즈의 영화에 외적인 방향을 열어준다는 뜻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주로 등장하는 “나란히 앉아 동일한 시선을 공유하는 일치의 화법”은 이 둘 간에 차이를 두기보다 궁극적으로 무언가를 등지거나 향하는 일을 묘사한다. 만약 오즈가 일본을 탈구축하는 방식으로 이와 같은 방법을 택했다고 본다면, 도리어 지적받을 만한 숏의 연결이 이 세계를 더욱 감각적으로 변모하게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완전하거나 고결하기만 한다면 여기서 감각은 배제되겠지만 도리어 이것이 끌어안을 만한 형식이 됨으로써 한 세계는 고통을 여분으로, 시간을 나선으로 배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쟁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에서 ‘금지된 몽타주’를 논했다면, 오즈가 고민했던 것은 두 세계가 함께 있는 일을 보여주는 방식으로서 ‘금지된 숏’이었다. 특히 오즈의 영화에서 카메라를 따라가면 이곳이 일반적인 가정집의 공간이라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공간’은 현실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에 도리어 화합의 측면에서의 ‘끌어안는다’를 실천한다. 영화가 현실을 따라하거나 담는 매체가 아니라는 점은, 이 세계가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가 아니라 그런 현실에서 ‘있을 수 없다’고 여겼던 게 사실은 으스스하고 기이하게 잊혀진 것들이었음을 깨달을 때야 비로소 자각된다. 오즈의 영화가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기존의 노력을 붕괴시킨다고 보는 입장은, 반대로 이 현실이 망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삶’이라는 것은 오즈의 영화 속에서 다루어지는 이야기로서의 삶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그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가 아니라 이미 끝나버린 것을 말한다. 당연한 명제로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한 영화를 과거로 인식하는 일이 우리가 그를 배제하거나 떠나야만 할 이유가 될 때 영화는 치유와는 거리가 멀게 된다. 어쩌면 추모하기보다 그냥 망각하는 편이 더 건강에 좋을 수도 있다. 고통을 견디는 힘은 한 숏을 발견하는 일이 과연 우리의 삶에 얼마나 융화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일과도 같다. 영화는 인간의 원죄를 두고서 작업한다. 그럼에도 오즈의 영화는 자신이 담은 게 눈에 보이는 것을 초과한다고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영화가 붕괴의 초석에서 다소 후퇴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오즈의 영화는 어떤 형태로든 한 시대를 감각하는 지점이 ‘드러남’을 우리는 안다. 전쟁이라던가 하는 큰 주제도 겉으로는 나서지 않지만 관객의 현실 안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영화는 한 세계를 잔존하게 둘 수 없고, 반대로 이곳에 남아있을 만큼 시간이 있지도 않다. 영화는 현실을 두고서 작업한다는 점에서 현실의 ‘이후’에 내쳐졌고, 그런 영화를 두고서 현실을 사유하기엔 이 사이에 자리한 간극이 너무 크다. 걸림돌이 된다는 건 그런 뜻이다. 영화는 그 자신이 내부로 붕괴하기에 현실을 담거나 하는 공간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모든 것, 사람들이 잊어버린 마음의 보완은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