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론을 공부한다고 해서 영화평론가가 되는 건 아니다. 이 말이 맞는다면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표는 전부 영화평론가였어야 한다.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영화평론가가 영화이론을 모르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해부학을 공부하는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 영화평론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영화이론을 더 공부해보려는 건 영화에 대해 ‘안다’는 사실 자체가 이론에의 탐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헌데 이 말은 마치 영화비평은 영화이론의 하위분과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처럼만 들려서, 어딘지 모르게 비평가를 연구자의 서브로 두는 듯한 느낌이 있다. 비평가는 연구자의 하위속성이고, 연구자는 비평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석사까지는 비평가지만, 박사는 연구자의 영역이라는 시선이 있기도 하다. 이 주장은 영화평론가를 지망하거나 활동하는 이들이 ‘석사’까지만 하게 되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박사를 하면 비평의 관점을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은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어쨌거나 연구의 하위속성에 비평이 있다면, 도리어 비평을 두고서 서브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기보다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의 관점에서 이를 말해보고 싶다.
아즈마 히로키는 일찍이 큰 이야기가 무력화된 세계에서는 작은 이야기가 연결을 대체한다고 말하면서, 생활철학이란 주변의 시답잖은 것들로 구성된다고 말한 바 있다. 비슷한 의미에서 시네필이라는 말은 하나의 큰 이야기를 지시하지는 않는 것 같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좋았던 시절이 지나버렸고, 사실상 시네필이라는 말은 어느 하나를 특정하지 않는 표현이 되어버려서 일상생활로서의 영화를 가리키기엔 이상한 말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시네필이 무엇을 뜻하는지 잊어버렸거나 혹은 자신이 아는 시네필의 정의에 자기가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런 현상은 시네필의 정의가 점점 작은 이야기로 분화하는 와중에 사람들의 인식은 여전히 큰 이야기를 말하던 시절에 머물러있는 탓에 벌어진다. 즉 이상으로서의 시네필이 있지만, 현실에서 이들 집단은 그런 이상을 감당할 수 없거나 혹은 모종의 이유로 소기의 영역만을 맡고 있어서 그들 자신이 시네필이 아니라고 여긴다. 영화는 여전히 이상적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작은 이야기로 이동함에 따라 자연스레 시네필이라는 말은 내부가 아닌 외부로만 사유된다. 이제 시네필이라는 말은 내부의 소속감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를 바라보며 자기를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오늘날 포스트 시네마 담론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의 시네필 문화를 지시한다. 연구에 관한 비평, 문화에 대한 서브가 되어버린 90년대 이후 출생의 젊은 시네필은 자기를 ‘이후’의 맥락으로 사유한다. 젊은 시네필은 그들의 과거를 ‘연구’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살아가는 곳은 연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는 과거의 하위에만 불과하며 이런 기준에서 과거의 ‘시네필’ 문화는 찬란하고 영광스러웠던 시절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를 레트로의 관점에서 이를 해석할 수 있다. 레트로 문화는 흔히 과거를 이상적인 무언가로 바라보는 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를 두고서 레트로토피아라는 용어가 등장하기도 하는 등의 담론이 있다. 이때 레트로는 ‘현재’를 상대화하고자 그와 같은 과거를 선택하는 일에 중점을 두는데, 현재는 좌표값이 이동할 수 없으므로 어느 한 외부에 상대화해야만 비로소 시점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현재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게 아니라 외부를 경유해서만이 관측 가능하다. 젊은 시네필이 어떠한 ‘이후’의 맥락에 놓여있다면, 그들 스스로를 성찰하며 돌아보려면 한 과거를 ‘연구’하는 일은 필연적이며 여기서 ‘서브’의 맥락은 부연된다.
이 점은 과거의 이상적 문화였던 시네필 문화를 두고서 우리가 ‘시네필’이기를 자청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들에게 시네필은 자신이 수행하거나 완수할 수 있는 과업이 아니라 자기생성과 인지를 위해 필요한 무대일 뿐이다. 캐릭터가 외부의 선을 땀으로써 한 세계 위에 올려지듯, 시네필에게는 현재를 연기하는데 그와 같은 담론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기실 연구와 비평 간에 우열이 없듯이 과거와 현재 간에 차등화될 요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과거를 탐했던 것은 과거와 현재가 모두 한 무대에 있다는 점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 둘이 어느 하나에 선두에 서는 게 아닌, [세계] 안에 영역을 둘 뿐인 두 연기자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다. 영화 문화에서 연구와 비평의 관계는 한 세계가 점점 빛을 잃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둘을 하나로 모은다. 소외가 포함 관계로 변형되는 과정에서, 포함되지 않는 것은 무언가를 포함하는 일이 된다. 시네필은 자기를 배제하기 위해 숱한 부연설명을 하지만, 이와 같은 분류 작업은 도리어 ‘자기’를 귀결하는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듯 보인다. 다시 말해서 큰 이야기를 향해 눈길을 보내는 일은 사실 자기를 속이는 거짓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시네필 문화는 한 세계를 상상하기보다 자기를 지켜내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우리’보다는 ‘나’라는 표현이 더 자주 등장한다. 혹자는 커뮤니티나 담론 등을 자신의 의견으로 대체한 사례를 지적하겠지만, 이 경우 “나는 시네필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그런 자신이 소속된 것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화가 될 수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여기서 ‘나’와 시네필은 서로 분리해야 한다. 이들은 ‘큰 이야기’로서 시네필 문화와 ‘작은 이야기’로서 시네필 문화를 구분 짓는다. 젊은 시네필은 자신들의 본류를 큰 이야기에서 찾지만, 이와 같은 탐색의 시도는 큰 이야기의 내부가 아니라 주변부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큰 이야기가 상실된 것을 가정한 상황에서 ‘내부’는 외부에 종속된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내부’는 ‘이후’와 같은 맥락에서 작동하면서 이들이 자기 세계의 종말을 사유하는 장치가 된다. 이는 우리에게 큰 이야기가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점을 뜻하면서도, 이를 복권하거나 대체하려는 시도를 부정한다. 젊은 시네필에게 영화 문화가 이후이자 바깥이라면, 큰 이야기의 역할 또한 작은 이야기의 지향점이면서 그와 동시에 작은 이야기가 아닌 것이라 할 수 있을 테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연구가 비평의 이후이자 바깥이라는 관점을 제기할 수 있다. 영화이론에서 연구는 영화에 대한 이해나 평가를 하는 분과이기보다 그게 돌아갈 수 없거나, 혹은 들여다볼 수 없다고 바라보는 입장에 가깝다. 연구와 비평의 관계가 겉으로 보기에 주류와 서브의 관계로 묘사되는 것은 ‘연구’가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향해 도전하기 때문이다. 연구가 영화를 하나의 꿈으로 사유한다면 비평은 사람들이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달리 말해서 ‘꿈’을 쫓는 이들에게서 꿈에서 깨어나기를 요청하는 것은 종말을 마주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연구와 비평이 공존할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은 대개 영화 문화가 하나의 거대한 꿈이며, 꿈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어떠한 [질서]의 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본다. 비평을 하는 이들은 그와 같은 꿈 세계가 무너지는 일을 피할 수 없거나, 혹은 내부가 존재하지 않으니 그에 소속될 수도 없다고 본다. 만약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에게 ‘일상’적인 이야기만이 남았을 뿐이라면, 비평의 과제는 그와 같은 일상이 도리어 ‘이후’의 관점에서만 펼쳐짐을 지켜보는 것이다. 비평이 연구의 하위 분과라면 그와 같은 비평은 낙원을 생각하는 일과도 같다.
젊은 시네필이라는 용어는 사실상 시네필 문화에 대한 시대적인 구분짓기로서 등장했지만 이와 같은 일에서 ‘연구’는 비평의 과제가 아니다. 도리어 시네필이란 그와 같은 현재를 ‘유산’화하는 집단으로 이해된다. 단지 질서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드러날 뿐인 세계는 남겨진 것을 활용할 뿐 그게 어떤 쓰임과 사명이 있었는지를 따져 묻지 않는다. 이게 소속감 같은 걸 느끼라는 뜻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령 영화가 처한 상황은 점점 더 혼성화됨에 따라 영화를 규정하는 방법이나 규칙 등이 희미해지는 일이다. 비평이 연구의 하위분과로 여겨지듯, 영화는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했던 일에서 다시 동굴의 어둠이었던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 문화에서 비평에 대한 연구의 우위에도 그런 사정이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한 세계가 [보존] 되지 못하리라는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화의 영역과 역할 등을 정의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그리 정의롭지만도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규칙 위에 쌓아올린 것들은 한 세계의 과거를 답습하지만, 메아리의 특징은 이미 부재하는 것들에 두려움을 느낄 뿐이라는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