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현은 대구광역시청년센터와의 인터뷰에 “불합치의 순간들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을 언급한다. 배우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미묘함을 지적하는 이 대목은 흥미롭게도 몇몇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이를테면 불합치라는 언술이 지시하는 몇몇 상황 중에 헌법이 있다는 점이 그렇다. 헌법 불합치 판결은 모든 법의 대전제가 되는 사항을 ‘부숨’으로써 여태까지 진술해왔던 여러 언행과 지시를 무너뜨린다. 아무리 합리적인 논증이라도 대전제가 바뀌어버리면 가차 없이 무너져버리고야 마는 몇몇 사례가 있다. “내 우주에선 그래.”라고 말했던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같은 것들. 그는 우주는 진공 공간인데 왜 폭발음이 들리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답했는데, 이는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맞지 않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이 불합치를 서스펙트의 낙차로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이토준지의 만화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토준지의 단편 중 모 에피소드에서는 달팽이로 변해버린 친구가 등장한다. 이때 등장인물은 달팽이로 변해버린 친구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하지 않고서, “음, 집에 데려다 키워야겠군.”이라는 식의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물이나 배경 등에서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지만, 이는 불합리가 아니라 불합치로만 여겨질 뿐이다. 언어에서는 보이지만 기호로서는 자각할 수 없는 것, 이게 바로 문화가 불합치를 향유하는 방법이다.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우리가 인터넷상에서 타인을 대할 때는 기본값으로 한국인 남성 화자를 상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청자가 외국인이나 여성으로 드러나면 여태까지 했던 언행을 돌아보게 된다. 혹시라도 상대방에 상처를 주거나 마음을 보듬지 못한 발언을 한 게 아닌지, 아니면 그저 가볍게 기대어 의사를 기만했던 게 아닌지와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면서도, 동시에 특수한 층위로 경계가 나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둘 사이에 겹치는 일이 없게끔 노력한다. 이때 영역의 충돌은 한 세계가 공유하는 규칙이 사람들을 가두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어디가 적절한 선인지를 탐색하는 일은, 만약 모두가 나아가려 하면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 이에 제약을 둔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처벌이나 형벌을 부과하는 일은 정해진 영역을 벗어나려는 이들에게 앞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선언하는 일과도 같다. 하지만 규칙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하지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언어는 무언가를 말하고자 발명된 것이지 상상한 것보다 더 낮은 수준의 표상만을 갖고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언어는 의제의 설정이나 진행에서 제약을 두지 않지만, 이를 문자와 기호로 표면상에 드러냄으로써 의사의 진행에 특정한 방향성을 둔다. 일컫자면 언어는 더 큰 표상과의 불일치를 미적으로 사유한다.
언어는 항상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 그 출발점의 논증은 도착점과 규칙을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언어는 도리어 나아가는 영역에 제한을 두지 않기에 변위의 낙차를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어디까지가 가능한 것인지를 탐색하는 일은 합의된 언어 수행 방식을 통해 드러나지만, 애초에 영역 자체가 다르다면 합의에 이르는 것은 영영 불가능하다. 상대방의 문화적 배경이나 사적 공감대 등을 암묵적으로 이해하고서 대화를 진행하던 중에 이와 같은 불합치를 겪는 일을 두고서 우리는 ‘탈룰라’라고 부른다. 탈룰라는 발화의 배경이 변위함으로써 지시어의 위상이 변화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때 언행은 이전과 같은 경로를 통하지만, 전제가 바뀌는 과정에서 오는 감정의 낙차가 있다. 합의에 이르는 게 아니라 언어가 도착하는 곳에서 역으로 출발점이 탐지될 때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이 망쳐지지 않으면서도 다른 곳으로 재배치되는 경험을 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한 세계의 입구를 통하는 것만이 상대방에 통하는 법은 아니고, 어떤 점에서는 자신을 ‘할 수 없다’라고 말하게 되는 쪽이야말로 스스로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일일 수도 있다. 한 세계나 사태를 들여다보려면 관찰자의 지위가 필요하고, 관측하는 위치가 달라져서는 안 되니 말이다. 자신이 다른 세상에 의해 들여다보아지는 경험을 할 때 깨어지는 것은 관찰자의 지위, 한 세계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미적 경험이다.
그런 점에서 <주술회전>은 불합치의 경험으로 작동하는 만화일지도 모른다. 작품의 후반에 손이 잘린 토도 아오이는 비브라슬랩을 장착하고 전장에 복귀한다. 토도의 박수를 대체한 이 악기는 손바닥의 접촉으로 실행되던 술식의 전제를 나무편과 금속구의 접촉으로 바꾼다. 전제를 바꾸었지만 여전히 같은 결론을 수행하면서도, 심지어는 더 좋은 성능과 활용도를 보여주기까지 한다. 대상의 위치와 에너지를 서로 교환하는 이 술식은 비브라슬랩으로 개수되며 말이 안 되는 수준으로 변모한다. 제약을 통해 의미를 확장하는 일은 ‘할 수 없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말이 안 되는 것을 통해 말을 이어가는 만화의 전개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다음 장을 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어쩌면 이는 어떻게든 말이 되게끔 해보고 싶다는 ‘노력’을 발산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건 아닐까. 영화의 세계는 자신을 끝내기 위해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한다. <뷰티풀 드리머>의 세계처럼, 꿈에서 깨어남은 모두 진실된 자기고백에서 비롯된다. 한 세계를 끝낸다는 건 영역을 닫는다는 것과도 같아서 결국 영화가 세계의 끝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오직 추락으로만 설계된 이 세계에서는 낙차야말로 영역을 확인받기 위한 수단이며, 이를 따라 부연하자면 전제의 불합치는 시작에서 끝이 파생될 때 도리어 그와 같은 시작점을 상실하는 미적 경험이다. 추락의 경험에서 상실되는 것은 ‘자기’가 아닌 세계인 셈이다.
토도 아오이의 술식이 하나의 낙차로 사유되는 일을 생각해보고 싶다. 이 술식은 하는 행위를 반대로 하지 않는 일로 바꾼다는 점에서 언어가 갖는 표상성을 연상시킨다. 서로의 위치와 에너지를 바꾸는 이 술식은 가만히 있었는데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탈룰라를 연상시킨다. 토도의 술식을 마주하는 적은 이를 두고서 ‘까다롭다’고 평하는데, 아무리 맥락을 따라도 결국에는 자신에 불리한 쪽으로만 귀결되기 때문이다. 전제가 계속 뒤바뀌기 때문에 공격의 논리가 조각나버린다. 애초에 서로 다른 규칙으로 게임을 했었다면 여기서 승패를 구분 짓는 일은 덧없을 뿐이다. 이야기가 어떤 지점으로 나아갈지를 궁금해하는 일은 그야말로 끝장을 본다는 것과도 같다. 마치 어디까지가 꿈인지를 알 수 없는 사람처럼, 주체는 세계가 자신을 밀어냄을 경험하기에 도리어 한 입장을 수면으로 부각한다. 처음부터 승패를 가르는 일 같은 건 필요 없었다며 우열을 가르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이 술식은, 끝자락에 이른 자신을 두고서 막장으로 부르기보다 그저 존재하기만 할 뿐이라고 본다. 여기서 위치와 에너지를 바꾸는 건, 방향을 바꾸지 않고서도 결론을 바꾼다는 점에서 서로가 자기를 굽히지 않고서도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음을 확인받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떠나온 곳을 잃어버리는 건 결국 광인이 되는 일이나 마찬가지지만, 시작점이 없다면 애초에 시작이 잘못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고민도 없다.
영화사가들은 영화의 미래를 언급할 때 흔히 “영화는 언제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간에 살아남을 것”이라고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 윤아랑은 한국고전영화의 계보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금동현을 인용하며 “언제나 우리에게 기반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진술한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이 반대로 고향에 대한 경험을 새로 얽는다는 이 관점은 영화가 감염과 위생학에 어느 정도 관계하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 문장은 영화란 게 정말로 존재했었는지를 의심할 때, 우리가 현재에 이르게 된 유전학적 우위를 저지한다. 불합치를 설명하던 대목으로 돌아가면, 영화와 디스포지티브는 배치에 따라 문맥이 달라질 수 있음을 설명하며 이는 곧 영화가 획득한 건 ‘생존’이 아니라 ‘잔존’임을 가리킨다. 혹자는 영화라는 게 특정한 영역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고, 이를 따라 전제에 불합치를 추구해야 한다고들 한다. 언제나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 영역을 추구해왔기에 결국 서로의 영역을 대결하는 것이 자기와 자기상실로 나아가는 일이 됐다며, 도리어 영화가 죽음을 맞이했음을 선언할 때 비로소 영화가 존재하게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미술의 다수가 공간와 유기적인 관계로 얽혀있듯, 영화는 한 개인이 놓인 삶의 상황에 얽힌다. 우리가 삶을 잃어버릴 때야 비로소 그곳에 삶이 있다. 상처 입고 주저앉힌 몸이 하늘을 올려다보듯, ‘낙차’는 우리의 쓰러짐이 바스러짐이 아니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