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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12. 2024

자주영화와 그루브: 망상증으로서의 영화

https://www.instagram.com/p/DAqdPE_SxPH/


INK에서 주최한 GROOVE 프로젝트에 다녀왔다. “치킨을 먹은 후 뼈를 재조립하면 어떨까요?”라는 주제로 영상을 찍고¸ 이를 하나로 편집하는 기획이다. 기획 의도는 영상을 편집하면 참가자들에서 닮은 구석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진행에 어려움이 있었다고들 한다. 목적으로 한 참가자를 다 채우지 못했고, 왜 이 기획을 해야 하는지를 설득하지 못했다. 영상을 자유롭게 찍어서 보낸다는 점과, 질문 자체의 추상성이 진입 장벽으로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그냥 자유롭게 찍기만 한다면야 상관없겠으나, 이를 하나로 엮어 한편으로 만들어본다는 건 이상하게 들린다. 다만 이 기획의 중점은 결과물의 완성도가 아니었다. 기획의 컨셉은 자주영화와 자생의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였다. 일상으로 찍는 영화는 사람들이 꿈이 서로 닮아있음을 증명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아무렇게나 나열해둔 영상 필름은 그저 악몽에 불과할 수도 있다. 맥락으로 아무런 흐름이 이어지지 않아서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실제로 현장 상영에서 나왔던 후기에서도 이 지적이 나왔는데, 외적으로 재미있는 일이 있기도 했다. 참가자의 영상 중 Chat GPT가 “인내심을 가져라.”라고 텍스트를 표출하는 장면이 있는데, 상영장비의 문제로 화면이 멈춰버렸다. 약간의 버퍼가 걸린 후 정지된 채로 5분이 지났고,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어서 오렌지색의 서브리미널이 지나고 펼쳐진 암전은 그제야 이게 작품의 의도가 아니라 상영사고임을 알아차리게 했다. 솔직히 말해, 기나긴 인내는 꽤 지루해서 알 수 없는 영상과 더불어 ‘악몽’ 같다고 생각하게 했다. 빨리 끝나서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영화가 달콤한 꿈만 같다면 아무도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현실을 말한다면, 도리어 영화는 악몽이 되어서 우리를 현실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령 시네필 문화가 주로 20대 초중반 위주로 흘러가는 것은 나이를 먹고 나서 영화에 대한 감응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으면 더는 예전처럼 여기에만 빠져있을 수 없고, 영화는 돌아봐야 할 것보다 멀어져야 할 것의 일부가 된다. 


INK의 프로젝트는 인내심을 가지라고 말했다. 기나긴 어둠이 끝나면 영화가 다시 시작될 것이라며. 편집을 진행했던 INK의 배은열 집행위원장의 말을 따르면, 작품의 이야기를 하나로 잇는 일이 몹시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내러티브가 있다. 짧은 영상은 닭이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하는 일을 보여준다. 영상에 등장하는 두 사내는 이 닭을 ‘악한 신’으로 부활시키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됐는지 한 마리의 순한 닭으로 살아나고야 만다. 이 서사는 영화를 악몽으로 부활하기보다 좋은 꿈이 되기를 바라는 것만 같다. 중간에 다른 영적인 존재가 개입했든, 아니면 단순한 사고였든 간에 부수적인 일은 중요치 않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공유 정신병과도 같아서, 한 공간에 있는 관객들이 서로의 망상을 전파하고 또 감염된다. 집단 광증으로 번지게 된다는 점에서 영화가 거대한 정신병으로 보인다면, 이는 ‘악몽’에 다름없다. 하지만 영화는 사람들을 악몽에 붙들기에 도리어 가족 유사성을 띤다. 행복의 모습은 하나지만 불행의 모습은 여러 개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가 지닌 삶은 여러 개고 그래서 악몽은 우리 모두의 삶이다. 


악몽은 우리의 아픔이나 슬픔을 하나로 잇는 ‘연대’의 효과가 있다. 설사 현실이 영화보다 더 추악하더라도, 현실은 분열되기보다 자기를 중심으로 구성되기를 택하기에 “영화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할 것”을 요청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거울을 보며 개인의 얼굴이 별개의 개체로 인식되는 일을 두고서 우리는 분열증이라 부른다. 거울 속의 얼굴이 하나의 ‘나’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울 속에 존재하는 독립 개체만을 본다. 그것들은 하나의 신체에 자생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니다. 대개 영화를 보는 상태란 게 그렇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서로 다른 생각을 품는다. 이는 한 사람의 주체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반대로 사람들 사이를 잇기엔 그리 좋지 않다. 악몽을 꿀 때 우리는 한 신체의 구성을 근처에 있는 다른 신체로 전염시킬 수 있고, 이는 어떤 면에서 이들 객체가 하나의 신체에 속해있음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뉴스에 드러나는 대형 참사가 도리어 국민을 한마음으로 행동하게 하듯, 영화를 악몽으로 바라보는 일은 관객들에게서 ‘공동체’ 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 


INK의 프로젝트는 한 영화가 악몽으로서 자기를 죽이는 방식과 이에 따른 살해를 분열적인 영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이 상영사고는 정말 우연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한 세계가 알을 깨고 나오기까지의 시간을 묘사한 것 같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망상증으로서의 영화를 떠올려보자.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는 전후의 황폐한 상황을 묘사한다. 기괴하게 뒤틀린 거리가 전후의 환경을 묘사하는데 여기서는 영화를 둘러싼 망상증의 범례를 떠올릴 수 있다. 망상증을 뜻하는 Paranoia와 좌우로 길게 펼친 규격인 paranoma는 para라는 접두사를 공유한다. 그리고 para는 “~를 넘어서”라는 뜻으로, paratext와 같은 용어를 통해 한 세계로 향하는 문턱을 만들어줬다. 동시기 초기영화가 다루었던 <오즈의 마법사> 같은 실례를 떠올려볼 때, 영화는 하나의 망상증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무지개 너머 그 어딘가”를 가리켰다. 영화는 하나의 유토피아였고, 현실과 공존하면서 우리가 너머를 바라보게 했다. 정말로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 현실에 달려가는 동안에만 존재하는 그 어떤 곳이 바로 영화였다. 


영화가 펼쳐놓는 꿈에 압도당하는 경험을 모두가 즐기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어한다. 영화는 한 개인을 연결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으며, 이는 마치 공유 정신병과도 같다. 이 병은 두 사람 이상의 개인이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사회와 신체면에서 고립돼있고 또한 외부와 상호작용을 거의 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이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과 정확히 같고 모두에 하나의 시련을 내리는 일이다. 영화를 본다는 건 현실을 낙관하거나 견디는 게 아니라, 용감히 체념하는 것이다. 극장 문을 나서는 것 이외에 영화를 중단할 방법은 없고, 영화를 본다는 건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기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으로써 실존의 고통을 벗어나는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서로가 연결되는 경험을 하는 게 바로 영화다. 폐허를 말하는 몇몇 회복이론은 테러와 재난 같은 범트라우마적 상황이 도리어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고, 또 연대하는 사례를 지적한다. 공유된 정신병은, 이른바 영화가 망상을 펼쳐놓는 작업이라면 이때 영화는 공동체를 암시한다.


영화가 관객을 망상증에 몰아넣는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혹은, 시네필이 정신병자 집단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기 드보르는 “하나로 통합돼버린 세상에서는 망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지적은 한 인간이 개인으로 실존하기 위해 마음의 벽을 구성했던 일화를 연상시킨다. 혹은 벤야민이 말했던 거대한 꿈이 덮쳐오는 일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한 사람의 개인으로 남으려면 도리어 마음을 벽을 쌓아 악몽에 대응해야 하는 건 아닐까. 어디로도 도피할 수 없다면 최후의 장소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Para는 우리를 나누는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한 영화는 우리를 한 현실로 나눈다. 영화가 펼쳐지는 순간 우리는 ‘이곳’과 ‘저곳’을 분리하게 되고 어떤 때는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 잃어버림의 경험은 다음 두 가지의 중첩이다. 너머를 보는 경험이 있고, 자기를 보는 경험이 있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그곳에 가지 못한 채로 남은 자기를 발견한다. 영화는 항상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있지만, 그 여정에 참여하지 못한 채로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조금은 단단해진 외피를 겉에 두르게 된다. 



잠에 들지 않으면 깨어남도 없다. 영화는 한 세계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한 시간이 되어준다. 길고 긴 터널은 모두가 한순간에 자기를 끝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준다. 한 생명에서 신체를 구성하는 것은 세부들의 길고 긴 여정과 쇠락이었다. 그래서 신체는 여러 악습을 답습하면서도 도리어 이를 청산하려 들지만도 않는다. 진화의 악조건은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장점도 그렇다. 진화는 같은 길로 유턴하는 일이 실패나 후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INK의 꿈은 자주영화를 찍는 것이다. 자주 영화는 영화를 자주 찍자는 뜻과 영화를 자주적으로 찍자는 뜻이 있다. 이른바 풀뿌리로서, 지역에서 산포하며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이들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은 자주영화가 지닌 중요한 가능성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거시적인 담론이 끝난 상황에서 철학은 차라리 일상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제 영화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보다 망상에 가깝고, 허구가 우위를 지닌 세상에선 자기를 속이는 거짓말이 도리어 성찰의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INK는 이야기의 장소가 아니라 장소의 이야기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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