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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21. 2024

자기 인지와 찐따의 세기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면 걸러야 할 남성 애니 캐릭터 3대장. 호타로, 하치만, 코요미(한국으로 치면 공주영, 유정, 성진우 정도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유머사이트에서 밈으로 돌았던 이 이야기는 소위 말하는 ‘찐따’ 남자를 대변한다. 자신의 부족한 남성성을 이입하는 대상이 된다고 말이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다. 일본의 유명 캐릭터 ‘쿠로미’는 멘헤라 문화와 엮이며 피해를 봤다. 프로필에 등용하면 본의지 않게 멘헤라, 혹은 그 캐릭터성을 추종하는 것으로 오해받기에 십상이다. 여기서 중점에 둘 건 캐릭터에 동질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소위 캐릭터성이 캐릭터로서 지닌 성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추종은 “캐릭터가 되고 싶어”이기보다 자신을 표현할 적합한 언어를 가리켰다’고 보는 게 좋다. 이를 따른다면 ‘쿠로미’ 캐릭터와 멘헤라가 얽히는 지점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자신’일 테다. 캐릭터로서 쿠로미가 실제로 착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미키마우스가 추는 춤만큼이나 쿠로미는 ‘오인’받아 감정적인 ‘부정’을 겪는다. 관계에서 부정교합이 이루어지므로 자연스레 무언가를 삼키는 일도 힘들어진다. 멘헤라 문화에서 쿠로미는 아마도 그런 존재일 것이다. 씹어 삼키기 어려워서, 그대로 삼켜내다가 소화불량에 걸리고야 마는 것. 마찬가지로 히키가야 하치만의 경우, 혹은 <Re: 제로>의 스바루를 추종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상처받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이곳엔 상처/죽음밖에 없다”는 속내를 지닌다. 이는 그런 속내의 범주를 ‘자기’에로 한정하면서, ‘자기’의 연장에 따라 고통을 분담하는 구조로 나아가고자 함이다. 


‘찐따’ 속성 캐릭터를 애호하는 일을 더 세밀하게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찐따는 정말로 자기이입과 대리만족의 대상일까? 한국에서 찐따라는 말은 대개 “어수룩해서 주위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정도로 통용된다. ‘절름발이’를 어원으로 갖는다는 설이 있고, 이 경우 ‘찐따’는 양다리의 리듬이 어긋난다는 뜻의 ‘찐빠’를 모어로 갖는다. 영역을 확장하면 “아귀가 맞지 않다”는 관용구와도 유사한 점이 있고, 주변에 잘 어울리지 않는 상태 등으로 요약될 법하다. 중요한 건 지속성이다. 절룩거림은 걸을 때마다 리듬이 어긋나므로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낸다. 이는 어떠한 상태를 규정할 만큼의 지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계속해서 연장된다는 뜻이다. 즉, 찐따는 이와 같은 연장을 벗어날 수 없음에 따른 ‘무기력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상태이기를 스스로 중단할 수 없다는 건, 앞서 말한 “자기의 연장에 따라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일로 이어진다. 자신을 나누어 타인을 고통에 빠트리고자 함은 아니다. 자기를 희석해 짊어질 곳을 없애려는 것도 아니다. 한 삶을 멈출 수 없어서 그 삶을 확장하는 것으로 제동을 거는 일은, 어쩌면 관성이다. 세계의 확장과 자아의 유지를 양립하는 일은 어느 한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버텨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부에서 새거나, 외부에서 깨어지게 된다. 균형을 잃으면 자기가 사라져버리기에 어쩔 수 없이 확장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자기에 한정되면서도 동시에 고통을 나누는 구조는 이렇게 형성된다. 자기인지로서의 ‘찐따’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조직을 불려 갈 수밖에 없는 ‘이상증식’의 상태인 것이다. 


생존을 향한 이 노력은 ‘너드남’과 같은 모습으로도 차용되는 듯하다. 너드남은 소위 ‘아싸’스럽지만 ‘찐따’는 아닌 성격을 가리킨다. 주류의 바깥에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절룩거려서는 안 된다. 즉, 주류와 어긋난 게 아니라 자기를 잘 이루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자기’란 게 주류에 반한 ‘나’로써 성립되는 일을 고려할 때 이는 몹시 어렵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는 도리어 세상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언급될 수 없기 떄문이다. 단순히 주류 사회를 모르는 ‘어수룩한 존재’를 찐따라고는 볼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찐따’는 그 자신이 찐따로 남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하는 존재다. ‘찐따’ 같은 남자, 혹은 너드남은 ‘자기’로 남기 위해 내부에서 외부를 향해 균형 외교를 한다. 끝없이 팽창하며 자아를 지켜내지 않으면 도리어 인싸로만 남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어느 정도라도 자기로서 남으려 해서일까?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하는 이 일을 두고서 우리는 [영역전개]라고 불렀다. 이 경우, 너드남은 한 세상에 침범당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자기를 확장해가는 일이 자기발전의 노력으로 이해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강현의 지적 처럼 영역을 설정하는 일은 현실의 ‘나’와 허구의 ‘나’를 적절히 분단하는 과정에서 후자를 전자에 역수입한다. 강현은 매체 담론에서 묘사하는 청년상이 도리어 그런 허구에 영향받은 청년 집단을 만든다고 언급한다. 마찬가지로 미디어나 매체가 묘사하는 캐릭터가 전적으로 허구라면, 이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를 딱 잘라 구분하지 못한다. 허구의 캐릭터로서 등장해온 ‘찐따’는 역으로 자기를 닮으려는 집단을 생성하며, 논의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어느샌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찐따 속성의 캐릭터는 마음이 외로운 사회를 보여준다고, 그렇게만 생각될 수도 있다. <나는 친구가 적다>나 <Re: 제로> 같은 만화는 시기에 따라 대세인 장르만 다를 뿐, 거진 남성향 하렘물의 특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남자 주인공에 저돌적으로 들이대는 여자 주인공에 반하는 것일 뿐, 이들 주역이 한 사회의 병폐를 가리킨다고는 보기 힘들다. 이들 주역은 시스템을 보여줄 요령으로만 성립한다는 점에서, 인터페이스의 일종이다. 반대 성별에서는 <내가 인기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네 탓이야>나 <외톨이 더 락!> 같은 경우가 있다. 이들 만화는 과거 여성 캐스트로 구성됐던 작품군이 ‘미소녀 동물원’ 수준에 머물렀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현 문제상황을 인식하고 이를 본격적으로 개선하려 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여성 캐스트가 우르르 출몰해 보기 좋다거나 하는 정도로만 인식될 수도 있지만, 성별을 바꿔도 별 무리 없이 대입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일단 전자와는 달리 후자는 연애 등의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다. 둘 사이, 혹은 군상극의 형태로 관계를 꾸려가는 일에 관심이 없다. 이는 의도적으로 남성 캐릭터를 배제해 연애 요소를 일절 제거하는 일과는 다른 쪽이다. 이런 상황에서 배제는 작품 내부를 청소해서 외부의 독자를 관찰자로 남게 하지만, 자기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배제란 걷기의 과정을 관측하는 것과도 같다. 한 프레임에서는 틈새로 가득하지만, 이를 24프레임으로 옮기면 빠져들 구석이 없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관계를 꾸려 지속하는 일에서 ‘자기’는 연장과 탈락을 반복하며, ‘나’를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변태를 거친다. 


여성 캐스트의 채용은 오히려 남성진에서는 나와야 할 ‘하드한 연출’을 지양하기 위해서인 듯한 인상도 있다. 여성 대 여성의 갈등에서 주먹이 오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걸 떠올리면 알기 쉽다. 여성 캐스트 주역 작품군의 ‘소프트함’은 백합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면서도 동시에 미시와 거시의 커플링을 염두에 둔다. ‘나’는 ‘우리’ 안에서 발견되고, ‘우리’는 나의 틀 안에서 긍정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자기’가 있다. 절룩거리며 아파하는 신체, 이들은 ‘절룩거림’에서 부정함을 발견하고, 이를 연대로 발전시킨다. 이는 한국에서도 허5파6 작가의 작품군 등에서도 관찰된다. <여중생 A>와 <아르마딜로> 같은 작품의 주연은 여성으로, 주변인물과의 관계맺음을 세계와의 연결점을 개선하는 일로 발전시킨다. 한 세계를 사유화하기보다, 우리에 자기를 대입함으로써 세계에 포섭된다고 볼 수 있다. 청소년이나 히키코모리를 소재로 한 이 작품들은 당시로서는 전부인 것만 같았던 세계를 말한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여기서는 자기를 비대화하여 세계를 부수는 일이 중점으로 다뤄진다. 그리하여 자기를 다루는 방식으로서의 연대란 사적 자기를 공적인 ‘나’로 연결하여 지속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남성 캐릭터에서 자기인지가 교란되거나 오인되는 일을 이런 측면으로 볼 수 있다. 너드남에서 발견되는 ‘찐따 미(美)’는 만화가 이상을 그린다는 한계점을 ‘결절’로 응용한다. 만화와 현실의 관계는 이상과 현실간의 관계와도 같아서 둘을 등치하다가는 절룩거리기 딱 좋다. 그러나 찐따는 이를 미래를 위한 확장과 폭발의 지점으로 사용한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일은 리듬의 부조화이기 전에 기본적으로 행위의 지속을 전제한다.

 

‘자기’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 다듬거나 제거되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한 지속의 과정을 연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칭한다. 소위 말하는 소년 만화에서 동료를 영입하고 힘을 기르는 과정이 미숙함에서 자기 비대로 나아가는 일을 떠올리자. 와타나베 다이스케는 “<룩백>이 머무는 애니메이션의 21세기성” 에서 20세기가 ‘나’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우리’의 세기라고 말한다. <목소리의 형태>를 언급하며 시선을 넘기는 곳은 바로 <룩백>의 쿄모토다. 잘 알려졌듯 <룩백>은 몇몇 텍스트를 외부에서 레퍼런스로 끌어온다. 그러나 구체적인 언급이 회피되는 가운데 이런 일은 기본적으로 ‘나’로 사유화되기보다 ‘우리’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진다. 독자가 발견하는 건 특정한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사적인 체험, 미시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룩백>은 그와 같은 미시와 외부 세계의 거시가 한 자리에 엮이며 발생하는 양태를 다룬다. 절룩거림을 경험 중인 쿄모토의 모습은 이곳에 외부를 틈입한다. <목소리>나 <룩백> 모두 타인에 의해 밖에 꺼내진다는 공통점이 있고, 이와 같은 중단에서 ‘자기’는 ‘타자로서의 나’로 변태한다. 즉, ‘우리’란 것은 나를 대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의 작품 사례는 남성형과 전체 이용가 등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그 근본에서는 ‘자기’를 연장하는 형태를 가리킨다고 보여진다. 요약하자면 찐따의 세계에서 관계는 ‘나’를 우리로 확장하는 형태, 상처가 사라질 수는 없지만 세계를 키워 고통을 나누는 형태로 ‘희석’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후지노가 쿄모토에게 “나오지 마!”라고 말했던 건 우리가 마주한 세기에 대한 한 가지 진단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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