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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26. 2024

<룩백>의 여성적 응시를 찾아서


여성적이라거나, 남성적이라거나 하는 말을 쓰기엔 너무 구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룩백>의 한국 흥행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은 시청자의 성별에 있다. 원작은 2022년 “이 만화가 대단하다!”의 남성편에서 1위를 했었다. 여기엔 여성 주역 2인의 성별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백합 자체는 특정 성별의 전유물이 아니지만 ‘여성 캐릭터 간의 우정’은 대개 남성에 인기를 끄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 [룩백]의 영화 판본이 개봉했을 때는 주로 여성 관객에 호소력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원작이 남성에 사랑받았던 반면, 영화 판본에서는 여성의 선호도가 더 높았다. 영화 <룩백>은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는 작품이었으므로 내용상에 별 차이가 없고, 따라서 이 차이는 톺아볼 구석이 있다. 단지 매체를 옮긴 것만으로 독자층이 달라질 수 있는 걸까? 


우선 ‘영화’로서 <룩백>을 논해보자. 작품의 주요한 변화는 매체에 따른 연출이다. 쿄모토의 사망 소식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장면을 보면 만화에서는 얇은 칸막이 형태로 제공된 ‘암전’ 효과가 영화에서는 화면 전체로 확장되어 있다. “2016년 1월 10일”이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만화에서는 짧은 인터미션의 형태로 제시되지만, 영화에서는 스크린 전체에 튀어나와 중앙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 장면은 만화에서의 ‘칸’이 확장된 것으로, 어떠한 ‘사이’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사이인가? 작중 시점에서 후지노는 쿄모토와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둘은 서로 단절되어 있고, 미래는 다소 불투명하다. 이때 만화가 안으로 담는 게 아닌, 사이로 벌어지는 것을 통해 시점을 제공하는 일은 어떤 형태로든 이와 같은 틈에 종지부를 찍는다. 칸과 칸 사이에 놓인 것은 틈새다. 


“2016년 1월 10일”은 한 사건이 두 사람 사이를 영영 벌려놓을 것임을 암시한다. 영화만이 갖는 매체로서의 특성이 시간임을 떠올리자. 영화에서 ‘멈춘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여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정지는 관찰자의 시간까지 멈추지 못하며, 화면이 멈추더라도 외부에서는 여전히 시간이 흐른다. 이 점은 영화가 후지노의 감정을 보여주는 일에 세밀함을 더한다. 사건에 대한 보도가 이루어진 후, 화면이 바뀌어 쿄모토의 영정 사진이 화면에 비쳐지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제 쿄모토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후지노는 아니다. 영화가 설명하는 ‘멈춤’은 후지노가 쿄모토의 죽음을 바라보는 일을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만화가 칸과 칸 사이에 검은 화면을 삽입함으로써 ‘바깥’을 가져온다면, 영화는 이를 관객의 시선으로 대체하는 효과가 있다. 즉, 만화가 사건으로서의 동시대성이라면 영화는 좀 더 개인화된다. 


만화 [룩백]이 쿄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과 동일본 대지진 등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잘 알려졌다. 큰 틀에서 보면 “사건 이후 예술은 무엇을 재현할 수 있는가.”라는 의식이겠고, 세부적으로는 예술의 배양에 관한 문제다. 즉 예술이 시대에 기생할 뿐인 존재라면, 시대가 망가졌을 때 예술은 독자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예술은 혼자가 아니며, 따라서 관찰자로만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룩백]은 이 점에서 자신을 게임의 플레이어로 만들기 위한 틈새를 설정한다. 의도적으로 뒷문을 열어 한 시대를 추모하는 의식이 드나들게끔 했다. 흥미로운 지적이라면 동시대 일본 매체에서 ‘문’의 역할이 비슷한 뉘앙스를 공유한다는 점이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 <문단속>의 스즈메도 그렇지만, 후지모토의 작품에서도 역시 ‘문’은 외부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를 잠시 외도해 [체인소맨]을 인용하고 싶다. 이 만화에 나오는 악마 중엔 영원의 악마가 있다. 주인공 일행은 어느 호텔에서 이 악마를 마주하는데 술법에 걸리게 되면 같은 공간을 반복하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체인소맨 덴지가 ‘영원한 고통’을 안겨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만화 [룩백]을 평하면서 [안녕, 에리]에서의 문의 활용 등이 거론되었는데, [체인소맨]도 비슷하다. 문이 양쪽으로 나열된 복도가 있고, 주인공 일행이 영원의 악마를 피해 내달리는 장면에서 이 문들은 마치 필름처럼 지나간다. 릴을 돌리기 위한 구멍이 뚫린 필름, 그리고 문의 나열. 가후쿠와 스즈메가 문을 잘못 열어서 자신의 상처를 발굴한다면, [룩백]과 [체인소맨]은 문을 열지 않는 편에 속한다. 한 영원 속에서 반복되는 게 동시대의 심상 중 하나라면, 차라리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만 비로소 한 시대를 ‘나설 수 있다’고 [체인소맨]은 말한다.  


[룩백]은 열리지 않던 문을 여는 것으로 끝이 나는 만화다. 후지노가 쿄모토의 if를 상상할 때 문은 상상을 위한 격벽이 된다. 하지만 “절대 문 밖으로 나오지 마”라는 말은 사실상 쿄모토의 고통을 연장할 뿐이다. 열리지 않는 문은, 망설임이기보다 영원에 가깝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후지노의 반응은 문을 열고 나아가는 것이다. 고통을 쿄모토의 몫으로만 남겨두기보다는, 산 자가 안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한 시대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지 우리가 구하지 못한 곳은 아니다. 용서를 구하거나 답을 구하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룩백]은 고통을 쫓는 이들에게서 찾는 해방구에 가깝다. 맥락으로 보면 <드라이브>의 종국에 가후쿠가 타인을 끌어안는 모습과 유사하다. 문을 열고 나오는 것과 상대방을 끌어안는 일에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맞섬’이 있다. 


다시금 [룩백]의 틈새로 돌아가면, 우리는 만화가 이들 묘사를 마치 ‘침투’하는 것처럼 묘사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마치 병원균처럼 인체에 침입했고, 사건이 갑작스러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다. 빗대자면 쿄모토의 죽음은 만화에서 선제타격되어 외연을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중요한 사건이 영화에서는 하나의 프레임에서 전체 프레임으로 확장되면서 화면 내의 ‘외부’를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영역을 전개하듯, 작품에 이입했던 관객은 바깥으로 밀려나고야 만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으로, 갑작스레 문 밖을 나섰을 때 빈 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다. 비스듬히 열린 문은 진리의 문과도 같아서 관객은 다시금 영화로 돌아오기 위해 개인의 삶을 대가로 바쳐야 한다. 특히 자신의 몸에서 가까운 무언가여야만 하고, 아마도 그게 조금은 더 개인화된 기억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진술하자면 [룩백]이 영화로 만들어지며 얻은 것은 이와 같은 개인화다. 이 대목에서는 앞서 <룩백>이 여성 관객에 호소한다고 지적했던 일을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관계에 관해서다. 일반적으로는 출연진 간의 관계가 세밀할수록 여성 독자에 소구력이 있다. 관계에 지향점이 있고, 이게 서로에 통용됨으로써 ‘바깥’을 허용하지 않는 게 여성 독자의 선호를 따른다고 보면 좋다. 남성이 선호하는 것은 그와 반대다. 남성 독자는 그 허용되지 않는 바깥에 머무르는 일을 선호한다. 관계에 직접 자신을 대입하기보다는 여기에 벌어진 사건 등을 가정하고, 이에 관찰자로 서는 것을 선호한다고 보면 좋다. 그러나 [룩백]은 외부를 향해 문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상상의 여지를 남기기보다는 그와 같은 상상에 두려움을 느끼게끔 설계되었다. 여기서 만화의 칸은 단계적으로 밟아가는 묘사를 함으로써 망설임의 감정을 증폭한다. 


‘다가온다’라는 점이 ‘멈춘다’라는 행위를 유발한다. 하지만 횡단보도는 언젠가 끝이 나게 되어있다. 이미 발을 들였다면, 신호가 끝나기 전에 서둘러 뛰는 편이 좋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다지 보고 싶은 결말은 아닐 수 있다. 후지노가 쿄모토를 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통을 마주하며 산다는 건 좋은 뜻에서 후지노에게 쿄모토가 사건의 출발점이 됨을 의미한다. 쿄모토에 의해 촉발된 사건은, 어찌 되었든 지평선을 향해 뛰어야 한다. 한 시대를 넘는다는 것, 이 단체 줄넘기의 감정이 바로 시대와의 여성적인 연대라고 말해두고 싶다. 바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사건들을 자신의 몸으로 체화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 여성적 응시는 한 사건이 보여지는 자리에는 사건을 목격하는 자리가 있다는 점을 되짚게 한다. 


사적인 생각이지만 예견되지 않는 형태로 죽음을 마주하는 쪽은 역시 여성이다. 이 문제에 개인적인 의견이나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자신과 연결된 무언가를 통해 작품을 마주하는 쪽도 여성이 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다. 특히 자신의 바깥보다는 내부로 체화된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게 여성이라는 점에서, 여성이 사건에 대한 사적 투영이 더 짙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영화로서 <룩백>이 얻은 성과는 단순히 시점의 차이만은 아니다. <룩백>의 “2016년”은 무성영화 시대의 간자막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간자막은 소리가 없는 시대에 인물의 목소리를 대신했다. 이후 유성영화는 필름의 위아래에 음성을 수록했고, ‘하늘’과 ‘땅’을 갖게 되었다(가령 무성영화에는 사면을 넘나드는 연출이 있다.) 이 점에서 <룩백>의 간자막은 영화를 우리의 내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한 시대의 스코프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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