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말을 할 때도 그런데, 하물며 작품이라면 어떨까. 처음부터 결론을 정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일에서 톤 앤 매너를 유지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만화나 드라마, TV쇼처럼 실시간으로 제작되어 해금되는 작품군에서는 인기에 따라 연재가 연장되거나, 작가와 제작사가 싸워 각본이 이상해진다거나, 배우가 물의를 일으켜 중간에 하차하게 된다거나 하는 상황이 흔하다. 이로 인해 작품이 본래 의도하던 방향에서 벗어나게 되고, 품질을 보장할 수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가령 <재벌집 막내 아들>의 경우, 마지막에 가서 있던 단 하나의 사건 때문에 작품 전체에 불똥이 튀었었다. 단순히 원작과 모사체의 관계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시청자에 대한 기만이라고도 여겨졌다. 혹은 웹소설에서는 그런 게 있다. 웹소설은 대개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작품 태그를 달아줌으로써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데, 이따금 이를 무시하면서 다른 장르로 핸들을 꺾는 경우가 있다. 백합 장르에 남성이 난입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처음 제시되었던 톤 앤 매너는 작품의 전개나 결말을 대략 예측하게 해주므로 이를 지키지 않는 일은 곧 독자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이를 잘 유지하면서 균일한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적어도 상업에서는) 작가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작품의 앞날을 예측할 수 있게 하면서 이를 벗어나지 않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를 안전하게 에스코트하는 것.
작품을 선보이는 일은 특정한 순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개하는 시점이 전반적인 흥행을 결정할 수는 있겠지만, 실황 운영의 특징 중 하나는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결정된 사항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이를 마치 결정된 것처럼 끌고 가야 한다는 게 실황 유지의 어려움이다. 반면 뒤로 가며 점점 상승 곡선을 그릴 수도 있다는 것도 이와 같은 형태의 장점으로,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기에 반대로 가능성을 얻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균일함을 유지하는 일이 작품을 가둬놓으며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OTT에 TV쇼를 선제작해 납품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적어도 작품의 매화마다 품질이 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어놨기 때문에 사전 검수가 가능한 덕택이다. 이는 대중으로 하여금 사전 제작된 시리즈를 ‘안전한’ 선택으로 여기게끔 하며 이와 같은 점이 OTT 작품군을 선택하게 하는 주된 동인이 된다.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이 게임에서도 있다. 게이머는 얼리액세스로 출시된 게임들을 두고서 ‘미완성’으로 여기며, 구태여 비싼 돈을 내면서까지 작품의 품질로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차라리 시간이 지나 구작 게임이 된 상황이면 버그도 다 잡았고 어쩌면 확장판본이 업데이트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때 저렴하게 구매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
여가 시간에 즐거움을 얻으려고 선택한 작품들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안전함에 머무르는 일을 두고서 막연히 비판하기보다는 작품의 전반적인 품질을 높인다고 보면 좋겠다. 콘서트나 공연도 수차례의 리허설을 거치며 배우의 숙련도를 높이고, 또한 상연 중에 벌어질 수 있는 우발적인 사고에 대응한다. 대중들은 어느 정도 검증된 작품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선택에 후회를 담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신뢰하는 러닝메이트에게서 작품에 대한 검증을 먼저 시도하며, 이를 따라 러닝메이트 시장은 대중문화에서 하나의 산업이 된다. 이때 “남들이 보면 자신도 따라 본다.”는 건, 어떤 면에서 나를 대신해 먼저 타인이 검증해주기를 바라는 선발대의 인상이 있다. 타인을 불확실성에 빠트리면서 자신은 안전함을 추구하려는 이 행동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함에 있어 자신을 ‘예비된 것’으로 두고자 함을 잘 보여준다. 느리게 간다는 건 안전함을 추구하는 것이고, 안전함에 머문다는 건 아직 남은 기회를 잃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여기서 핵심은 기회를 얻는 게 아니라, 기회를 잃는 일에 대응한다는 점임을 주지하자. 사람들은 각자의 기대감과 행복을 안고 있으며 이를 잃지 않고 잘 가져가는 게 콘텐츠 소비의 주된 목표이다. 즉, ‘예비’라는 것은 자기를 ‘지킨다’는 쪽에 가깝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전 제작된 시리즈는 더는 발전할 구석이 없으므로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 안전한 선택을 하는 일은 혁신적이지 않다는 뜻도 되고, 그만큼 뒤처져있다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변화에 곧바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위험 분산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간을 따라 움직이는 것들은 독자와 감정적이거나 정서적인 유대감을 쌓기에는 유리하나, 그만큼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감정적인 격리 없이 곧바로 전파되므로 ‘전염’에 몹시 취약하다.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이와 같은 감염의 사태에서 면역체계를 발휘하는 일과도 같다. 대중의 평가가 아닌, 스스로 판단하고 느끼려면 동시대와 엇박자를 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에 대한 위험이 커진 상황에서 ‘예비’는 분명 망설임일 수는 있다. 다만 이와 같은 예비는 단순히 한 세계의 앞에 멈추는 것만이 아니라 한 세계를 끌어안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느림의 미학이란 동시대에 동떨어졌다는 고립감이 아니라 여유롭게 풍경을 감상하는 느긋함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일에서 유발되는 수정 가능성의 행보다. 어떤 것의 앞에 선다는 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미 결정된 것이라도 쉽게 되돌릴 수 있다는 결심을 동반한다. 다시금 자기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처음에 예측했던 바로 그 결말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기보존적인 운동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점점 더 가속하며 빨라지는 시간들에서 선택에 따른 책임이 커짐에 따라 일어난다. 자기에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은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토대로 자신을 예측가능한 범주에 넣는다. 안전한 선택을 하면 결말도 예측가능하기 때문에 자신 또한 예외를 겪을 일이 없다. 즉, 한 풍경에 속하고 싶어하지 그런 구도를 벗어나서 그림을 망치려 들지는 않는다. 직접 연애를 하기보다 다른 이의 연애를 보며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직접 결혼을 하기보다 다른 이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티비 쇼는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겪을 수 있는 우발적인 상황들을 격리하면서, 시청자가 ‘안전함’에 머무를 수만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싶다는 이 마음은 화면 속의 엔터테인먼트가 속임수라 할지라도, 이를 굳이 파헤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끌어안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고, 이는 사람들이 연애나 결혼 등을 직접 할 수 없다거나 꺼려서가 아니라 한 상황에 대한 예비를 두고자 함이다. 마크 피셔의 관점으로 본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하지 어느 날 갑자기 전원이 꺼지듯 의식이 사라져버리는 일을 원치 않는다. 파국의 순간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그와 같은 파국에 소속되지 않고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므로, 자신이 예측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와 같은 예측에 대한 지지 선언과도 같은 이상 항상 ‘예비’를 둘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망설임은 미련함이 아니라 신중함이고, 잉여가 아니라 여유분이다. 한 발자국 떨어져 어떠한 결과를 ‘예측’하기만 하면 작품이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자기 책임은 하나도 없다. 자신이 이 결과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품질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가능하고, 또 결말로 상처받을 일도 없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 주목할 만한 건 작품에 대한 책임의 부재가 결말에 관한 수정가능성으로도 이어진다는 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작품의 결말이 이어지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일은, 단순히 작가와 제작진에 대한 성토만이 아니라 작품을 소화하는 정도와 그에 따른 수용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것은 애초에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조금은 지켜보면서 안전하게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 되면 안에 진입하겠다는 뜻과도 같다. 이미 다 끝난 것을 두고서 느리게 다가선다고 보기보다 ‘실시간’이 갖는 러닝메이트로서의 관점에서 앞쪽에 손을 내밀고 싶다는 쪽에 가깝다. 자신은 이 미래를 붙잡고 싶다. 그러니 이 미래가 어떠한 결과로서 좌절된다면, 적극적으로 나서며 미래를 고쳐보려 시도해보아야함이 마땅하다.
이는 대중이 작품에서 예비를 구성하는 방식이 단순한 방조가 아니라 감정적인 격리, 혹은 안전함을 획득하려는 쪽에 가깝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쩌면 한 작품에 앞서 냉소적인 태도를 갖는 것을 두고 ‘차갑다’고 볼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구한다’는 마음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진심으로 통한다. 독자들이 작품의 결말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일은 다가올 미래와의 충돌을 ‘없던 일’로 하자는 게 아니라 이를 끌어안을 만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령 예측하기 힘든 결말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건, 자기인지의 통제권을 외부에 넘겨주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 자주적인 일이기도 하다는 걸 떠올리자. <진격의 거인>의 경우 사람들의 비판을 얻어 만화의 판본이 애니메이션에서 서로 다른 결말로 나아가는 일이 있었다. 본래의 대사가 독자가 알아왔던 이해를 배신했다면, 원작자가 참여해서 새로 쓴 대사는 이미 흘러간 과거를 바꾸기보다 어떤 미래를 붙잡고 싶은 듯 보였다. 이미 결정된 사항을 두고서 이를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작 만화의 해당 장면은 손쓸 새 없이 퍼져버려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다시금 한 미래를 붙잡고자 하는 건, 사실을 부정하거나 배척하는 게 아니라 다시금 앞을 바라보고 싶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미 결론 난 일을 재론하기보다, 서로 다른 두 개의 판본을 만드는 일을 생각해본다. 『룩백』 같은 만화를 보면 어떠한 결론이 제시되면서 동시에 이를 끌어안을 만한 예비가 제시되곤 한다. <조커: 폴리 아 되> 같은 일처럼 어떠한 예측이 엇나가면서 사람들이 나아가려던 방향 자체가 좌절되는 때도 있다. 아니면 「하이브」 같은 웹툰처럼 아예 에필로그 형태로, 한 일화를 다르게 바라보았다는 가정의 ‘예비’를 제시할 수도 있다. 이들 사례는 객관적인 현실, 준거점이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서 이를 따라 기존에 제시되었던 결론을 바꾸는 것은 현실을 수정하는 게 아니라 그저 다른 방향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냥 다시 쓰면 그만이라는 수정주의를 고수한다면 무엇보다 이를 지지하게 될 독자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이 망설임을 동반한다면, 한 시절을 대하는 태도는 이를 지나치는 게 아니라 망설임의 형태로 그 앞에 서 있는 게 되어야 한다. 이미 다 끝난 게 아니라, 이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마음에서다. 그리고 무언가를 안으려면 그와 한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끌어안음은 동시에 무언가를 밀어내고 있다는 현상 원리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부모가 아이를 안는 일이 아이를 하나의 객체로 인정하기에만 가능하듯, 예측을 벗어난 결말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이 알던 그곳이 아니더라도 이를 인정할 줄 아는 성숙함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