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로봇>(2024)
<와일드 로봇>을 보면서, 문득 [트랜스포머]의 비스트워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맥시멀이 생각났다. 이 종족은 로봇인데 동물 형태로 변신하는 게 특징이다. 마찬가지로 <와일드 로봇>의 로봇 로즈는 섬 동물들의 모습을 모방하고, 이를 전투에 응용하기도 한다. 로즈는 곰으로도 변하고, 사슴으로도 변한다. 로즈의 적응 능력은 그녀가 이곳의 동물보다 대체로 더 ‘우월’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이들을 이해하고 다가서는 일에 도움을 준다. 이는 환경 적응 능력이 단순히 대외적인 신체 능력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섬의 동물들을 자신의 편으로 돌린 것은 로즈의 역량이었다. 로즈는 이를 위해 자신을 구성하는 것을 차례대로 버렸고, 이를 겉으로 드러낸 게 위와 같은 ‘모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로즈가 프로세스를 파괴하며 재구축하며 ‘새 인격’을 얻듯이, 로즈는 상처 입고 동력원이 고장 나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섬의 식구로서 ‘새집’을 얻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로즈가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봇이니까 아플 구석이 없다는 말을 접어두자. 브라이트빌이 자신을 밀어냈던 날, 로즈는 갑작스레 자리를 뜬다. 핑크가 다가와 로즈에 “말이라도 하고 어딜 가야 할 것 아니냐”고 물을 때, 로즈는 명백히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 마치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모습을 한 이 장면에서 우리는 ‘감정’이 결국 모방의 일종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는다. 누군가의 얼굴을 따라 한다는 건, 한 존재의 표면을 따라간다는 것과도 같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숱한 스침과 미끄러짐을 경험하며 그만큼 오인과 착오에 시달리게 된다. 로즈가 육아를 하며 겪은 시행착오가 그녀 자신을 성장시켰던 건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로즈를 회수하러 온 다이다믹스 사 관리자의 말에 따르면, 로즈는 프로세스를 자체적으로 수정하며 인격을 바꾸어낸 ‘특이케이스’다. 로즈의 자기인지는 한 세계를 ‘모방’함으로써 존재의 탈구를 경험한다.
데리다는 자기 해석에서 탈구되는 것을 두고 ‘해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자기 한계를 드러내는 일로서의 탈구란 로즈가 자신을 바꿔가는 모습을 잘 설명한다. 처음에 로즈의 자기인지는 내부 프로세스를 따라 갇혀있었지만, 점점 외부를 모방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녀 자신을 한 [세계]의 일원으로 만든다. 로즈를 구성하는 프로그래밍이 내부로 외삽되는 자기 해석을 창조했다면, 여기서 탈구란 자기인지를 재구성하기 위해 자신을 상처입히는 일이다. 로즈는 어느샌가 자신을 구성하는 회로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갔다고 말한다. 이성에서 감성으로, 행동에서 정서로. 부모가 된다는 일을 묘사하며 감동을 준 이 장면은 분명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의 중심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적응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로즈는 로봇으로서 고객에 도움을 주고,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목적을 따라 브라이트빌의 삶을 보완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브라이트빌이 그녀를 각인한 것만큼이나 그녀는 ‘부모’를 모방했다.
하지만 모방이 꼭 나쁜가? 영화의 후반, 회사의 관리자는 자신을 두고서 “감정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프로세스를 따를 뿐”이라고 소개한다. 이는 로즈가 프로세스를 따르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일과 대비를 이룬다. 로즈는 기본적으로 무기체지만, 유기체의 외견을 ‘모사’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을 한 기계라거나 하는 것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무기체가 굳이 유기체를 모사한다면, 유기체만이 갖는 무언가를 부러워해서인 것인가. 다시금 비스트워즈의 맥시멀을 떠올려본다. 맥시멀은 자신을 받아들여 준 지구 행성에 ‘동화’되고자 이런 선택을 했다고 한다. 맥시멀의 의태는 한 [세계]에 보내는 존중의 표시였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로즈가 동물들의 의뢰를 수행하고자 그들의 언어를 학습하고 이해하려 했을 때, 그녀는 섬에 동화되었다. 이 모방의 과정은 서로 다른 분류군에 속해있는 것들이 어떻게 자기 해석에 탈구될 수 있는지, 한 세계를 내부로 외삽할 수 있는지를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단순히 생각하면 고릴라나 독수리보다는 탱크나 전투기 같은 형태로 변형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무엇이 더 전투에 효율적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맥시멀은 자신이 추구해온 한 가치를 유지하고, 보존하려 하는 듯 보인다. 자신이 사는 이 세계를 ‘선택’한 게 아니라, 받아들여졌을 뿐이라는 이 생각에서는 지구 행성과 함께 산다는 것의 논리가 돋보인다. 트랜스포머의 디셉티콘이 지구를 정복하거나, 사이버트론으로 복속해야 할(테라포밍)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다른 입장이다. 오토봇이 자신들을 지구에 온 손님으로 설명한다면 맥시멀은 행성에 받아들여져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자기들을 인식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지구의 생물을 ‘모방’하고, 어느 정도는 사이버트론인의 본성을 잠재운다. 쇠와 철로 된 몸체이기보다 피와 살로 된 몸체를 두르면서 그들은 철의 꿈을 꾼다. 이와 유사하게 로즈는 동력원을 잃은 뒤부터 주기적으로 잠을 자게 됐다. 마치 잠자리에 드는 유기체처럼, 매일 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난다.
태양열 기반으로 동작하는 로즈에게 밤은 활동이 제약되는 시간이다. 몸을 웅크린 채 동면에 들어가는 모습은 섬의 동물들이 겨울을 맞이하는 모습과 비슷한 느낌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즈는 기계 동력원을 잃은 후부터 자연의 메커니즘인 태양열을 사용하게 되고, 이는 그녀가 무기체에서 유기체로 이동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그녀는 나무 의족을 사용하게 되는 등, 거진 자연에 동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을 어떠한 ‘존재’로서 파악하기보다는, 자녀를 길러 독립하게 하는 등의 역할에 더 충실해지려 한다. 데리다식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 모습은 그녀가 무기체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게 아니라 도리어 부모로서 한 세계에 받아들여졌음을 상기시킨다. 아들인 브라이트빌이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묘사되는 흐릿하고 따스한 질감의 시야를 떠올려보자. 한 세계를 깨고 나온 브라이트빌이 로즈를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로즈는 어머니가 된 게 아니라, 브라이트빌이라는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에 던져진 존재로 규정하면서 인간 존재를 ‘각오’와 엮는다. 성경의 인류가 에덴에서 내쫓긴 게 과오 때문이었다면, 현실의 인류는 죽음을 마주하고 또 이를 각오함에 따라 한 세계에 내쳐진다. 이 점에서 섬의 환경은 로즈가 자신을 바꿀 것을 각오하게 했다. 이를 단순히 적자생존으로 적어도 좋다. 어쨌거나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로즈는 섬의 환경에 잘 적응했고, 성공적으로 생존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 생존은 그녀가 보여준 각오가 한 세계를 일순하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깊다. 일순은 단순한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에 차이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한 세계가 닫힌 구가 아닌 자생하는 세계임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에 로즈가 남긴 것은 자신이 없어도 서로 화합하며 의견을 나눌 자리였다. 이 일말의 조치라도 없었다면 분쟁이나 재난이 닥쳤을 때 서로 소통하며 의견을 구할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로즈가 자신의 내부 세계를 깨트렸듯, 이 세계가 기후 변화에 적응하려면 무언가를 각오해야만 했다.
<와일드로봇>의 후반부에는 기후변화로 바뀐 환경이 물에 잠긴 금문교를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동물들은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없고, 이를 가엽게 여긴 로즈가 자신들의 집에 동물들을 초대하게 된다. 이때 반원 형태로 지어진 이 집이 지구 행성에 관한 은유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없을 테다. 조금은 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이 주장은 로즈가 한 [세계]를 부순 것만큼이나 항상성의 유지가 한편으로는 자기에로 복속되려는 힘, 즉 자기억압이 될 수 있음을 절실히 드러낸다. 물론 인간이 급격한 기후변화에 대응하려면 유리온실을 지어 그 안에 틀어박혀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이 올려다보는 게 유리 너머를 펼친 깊은 하늘임을 잊을 수도 없다. 언제나 [세계]는 바깥을 향해 열려있고, 이를 반영하는 것은 자가당착에 빠진 환류 시스템이 아니라 틀과 형식에 들어맞지 않는 야생의 체계이다. 푸코는 이를 두고서 광인은 행복하다고, 이성의 사고에 속해있지 않기에 어디로든 항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도 말했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 영적이거나 종교적인 개념을 익히는 것은 흔히 고등 생명체의 증표로 여겨진다. 가령 인류의 장례식이 인류사의 초창기부터 묘사된다는 점과 코끼리가 동료의 죽음을 기리는 방식 등이 잘 알려졌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단순한 무기물이나, 활동을 멈춘 유기물 덩어리가 아님을 이해해야만 이런 행동이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과 동물을 두고서 이성의 유무로 이를 구분했던 서양 철학에서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다시금 무언가를 구획하여 재단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자기’는 무언가를 말하기보다 항상 나아갈 길이 가로막히면서, 판단 중지를 따라 한계를 규정짓는 방식으로 정의되었다. 여기서 내가 아닌 것으로서의 타자가 발생하고, 타자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자기를 말하는 방식이 된다. 이 점에서 <와일드로봇>을 말하는 한 가지 수식이 있다. 내쳐짐은 중단이라는 것, 로즈는 프로세스를 바꾸고 인간도 생태를 바꾼다. 모두 공장초기화가 필요하지만, 여기엔 잊지 않는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