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Dec 02. 2024

 마음에 찔린 것들


방탄소년단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은 아마 “너 자신을 사랑하라”일 것이다. 2018년의 UN 연설에서 언급되기도 했던 이 문장은 2017년과 2018년에 걸쳐 발매된 앨범 ‘Her’과 Tear’의 음원 활동에서 비롯된다. 음악을 들으며 자기 존재의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고, 팬 활동을 통해 타인과 연결된 경험이 방탄소년단 팬들의 사례집에 실려있다. 화음은 서로 다른 구성요인을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한다는 점에서 방탄의 노래가 왜 서로를 연결했는지를 알 것만 같다. 미국의 학부모들에게 ‘건전가요’로 분류되었다는 방탄의 노래가 UN 연설 무대에 올라간 것은 그리 개연성 없는 사건이 아니었다. 오늘날 ‘연결’은 동질성을 이루는 집단 관계이지 하나의 관념에 속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이 광속으로 달린다고 가정했을 때 이미지는 하나의 점으로 수렴한다. 이 수렴은 서로 다른 것들이 비슷한 모양새를 하게 되는 것이지 차이를 무마해 서로에 동조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 둘은 서로 유사해 보이지만, 관계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결정적으로 다르다. 마치 외부를 규정하는 일이 나를 가두는 일과 나를 인정하는 일로 나뉘듯, 방탄의 노래는 바꾸지 않고서도 바라보는 법을 말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이를 두고서 객관적 현실이라 부르며 그렇기에 되려 현실을 바꿀만한 힘이 있기도 하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발이 닿는 단단한 땅이 필요하듯 이따금 자신을 바꾸는 일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를 요구한다. 방탄의 음악은 바로 이 어찌할 수 없는 면을 두고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대목으로 설명한다. 어떻게 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일에도 단단하게 살아남는 자신을 뜻한다며. 방탄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만약 방탄이 버츄얼 아이돌이었다면 어땠을까. 방탄이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존재의 고립을 느꼈다. 세상이 자신에게 무언가가 되기를 요구할 때 방탄의 음악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했다. 이를 통해 팬들은 연결되었지만 단절되지 않을 수 있었고, 고립되었지만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방탄이 버츄얼 아이돌이었다면 여기서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질 수 있다. 버츄얼 아이돌은 연기자가 현실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상에 기반해 활동하기 때문에 존재를 확정하여 긍정하는 과정에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버츄얼 아이돌의 세계는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며, 그렇다면 현실을 바꿀 수 없는 듯 보인다. 


 버츄얼 아이돌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팬과 같은 현실이지만, 이를 닮은 가공의 어딘가를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몰입을 위해 버츄얼 세상과 팬의 세상이 ‘같다’고 여겨질 만한 문화나 언어 등을 설정하지만, 결국 버츄얼과 현실이 서로 다른 곳임을 말하고자 이 둘을 평행관계에 두게 된다. 이제 버츄얼 아이돌이 UN과 같은 연설 무대에 설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가능하지만 의미가 수행되는 방식은 방탄의 사례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버츄얼 아이돌은 이미 그 자신의 현실이 변화에 속해 있으므로 팬들의 현실에 빗대어 차이를 형성할 수 없다. 버츄얼 아이돌이 존재자로 존재하는 방식은 오로지 팬들의 믿음, 그리고 나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믿음뿐이다. 믿음과 믿음이 만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연결은 서로가 같은 풍경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또한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같은 결과값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이룬다. 즉, 버츄얼 아이돌에서 ‘나’란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라지거나 혹은 그래도 괜찮은 무언가다. 나를 대신하는 세상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를 이루는 것은 결국 자기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을 알게 되는 순간, 자기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관해 말하는 일이 된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서 포스트모던하다는 농담 섞인 말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물로 된 신체가 있는 아이돌과 팬의 관계가 가상의 연애 관계에 빗대어지지만, 버츄얼 아이돌은 서로에 무언가를 주고받는 호혜적 관계이기보다 자신이 바라는 무언가를 수행하는 존재로서 이입되는 경우가 더 많다. 과몰입과는 별개로서, 자신이 가지 못한 무언가를 향해가는 존재로 지정되고는 한다. 가령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신체가 팬들에게 마음을 전한다면 가상의 육체는 어딘가에도 자신처럼 고민하고, 꿈을 꾸는 누군가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자신이 하고 싶었지만 끝내 다가서지 못했던 것들에 관한 사례는 버츄얼 아이돌에 희미한 현실감을 조각모음 하는 도구가 된다. 말하자면 팬들이 버츄얼 아이돌을 보며 얻는 것은 ‘그들’의 행복이 아니라 ‘나’ 자신의 행복이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행복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규명한다는 점에서 버츄얼 아이돌에 대한 팬 활동이 실물 아이돌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같은 결론으로 수렴됨을 보여준다. 버츄얼 아이돌을 향한 애호는 자신에 대한 구명활동이기도 하고, 달리 말해서 우리가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는 서사에 열광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에 관한 이야기여서다. 


버츄얼 아이돌에 관한 정의는 어느 하나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면이 분명 있다. 플래디스와 같은 대형 기획이 기술적으로나 현상적으로나 가장 주류 문화에 가깝다면, 이세계 아이돌이나 QWER은 그보다는 더 서브컬처에 가까우며 더 나아가면 지하 아이돌에 해당하는 인터넷 방송인이 있다.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많고 다양한 점에서 차이를 보이며 이 점이 주류 문화로 쉽게 파악되지 않는 면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가상’이다. 본래 아이돌 문화가 환상을 판매하는 직업이라는 지적이 존재한다면, 버츄얼 아이돌의 경우는 이미 존재 자체가 환상이라는 맥운을 하므로 다시금 환상을 판매한다는 일이 중첩 반복문이 되어버린다. 이를 따라 버츄얼 아이돌에 대한 정의가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생각해볼 법한 것은 ‘무엇’에 대한 환상인가 하는 점이다. 가상 세계에서만 만날 수 있기에 버츄얼 아이돌이라는 말은 실패와 좌절이라는 서사에서 발흥하는 ‘나’의 존재를 그와 같은 세계에서만 긍정하게 되어,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여기게 한다. 이로 인해 현실은 한 존재에 대한 예비로만 여겨지게 되어, 자신이 바라는 이미지의 후면에만 항상 자리 잡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러니 여기서는 이와 같은 가상의 개념을 재고해보고 싶다. 주류 문화에서 아이돌 산업은 브랜드 산업과도 같아서 아이돌이 추구하는 방향성이 곧 팬 자신의 가상이 된다. 반면 버츄얼 아이돌은 겉으로 노출되어 움직이는 아바타가 모에의 맥운으로 조합된 ‘텍스트’가 된다. 즉, 여기서 환상은 겉으로 노출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환상을 움직이는 것은 어느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이들을 매개하는 기술적 흐름이다. 이 때문에 현실에서의 아이돌은 그룹을 탈퇴하거나 혹은 부캐로 활동하더라도 이를 연기하는 스타 개인에 대한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그 ‘기술’의 방식은 전적으로 아이돌과 팬 사이를 메우는 일에 사용된다. 버츄얼 아이돌의 정체성은 겉으로 내비치는 아바타와 안의 사람이 기술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아이돌과 팬 서로가 각자 노력했던 부분이었던 ‘기술’의 노력이 프로그래밍에 대체됨에 따라 환상을 통제하는 것은 이들 간의 유대나 관계가 아닌 ‘바깥’의 세계가 된다. 바꾸어 말해 버츄얼 아이돌은 그와 같은 통제를 외주화한다. 즉 그들은 이 세계가 자신이 바라는대로 굴러가지 않음을 잘 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관해 말하는 일은, 나를 이루는 남은 순간과 마지막 것들에 관한 추도사인 것이다. 


자신이 한 세계를 등지고 서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나 자신’에 대한 사유로 이동할 때 인식의 축은 자신이 된다. 존재가 너무 세상과 연결되어서 역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과연 자신을 말하는 것은 존재의 고립일지, 발산일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이는 거대한 군중의 일원이 되는 일에서, 화음을 구성하는 음표가 되는 일에서 존재의 충만을 얻지만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반복 안에서 자신을 하나의 차이로 발견하는 일에서 그와 같은 충만을 얻기도 한다. 따라서 전자를 [세계]로, 후자를 단자로 표기해보자. 버츄얼 아이돌 업계에서는 안의 사람이 어떤 이유로 해당 아바타를 연기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두고서 졸업이라고 표현한다. 그게 회사와의 관계이든, 아니면 현실적인 이유든 간에 더는 자기를 이룰 수 없게 되었기에 그런 표현을 쓴다. 중요한 건 누가 봐도 같은 사람이 연기하는 게 확실함에도 서로 다른 아바타라면 둘 사이에는 무조건 졸업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실의 아이돌이 모든 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기억한다면 가상의 아이돌에 대한 팬 활동은 자신이 되고 싶지만, 도리어 될 수 없기 때문에 삶의 원동력이 되는 일에 관한다.   


흥미롭게도 팬들의 입장에서 ‘사라져도 괜찮다’고 보는 것은 도리어 버츄얼 아이돌 쪽이다. 현실의 아이돌이 활동을 중지하면 한 세계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버츄얼 아이돌이 졸업하는 일은 자신을 이루는 것 중 하나를 잃을 뿐이다. 현실의 아이돌이 활동을 중단하면 다들 걱정하거나 의구심을 품는 등의 다양한 감정을 내보이지만 버츄얼 아이돌이 활동을 접으면 ‘그냥’ 사라졌다고만 여긴다. 이는 익명으로 활동해서 온라인에서만 팬들을 만나는 버츄얼 활동의 특성 탓이기도 하지만, 이들을 매개하는 게 무엇인지에 따라 다른 결과로 이어진 것이기도 하다. 현실 아이돌의 활동에서는 둘 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란 게 있지만 버츄얼 아이돌의 활동에서 기술은 프로그래밍의 일종이고, 따라서 자신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한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지만 기술은 ‘바깥’이어서 별달리 손대거나 바꿀 수 없으므로,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으며 마찬가지로 시작과 끝을 규정할 수 없으니 ‘존재’와 ‘비존재’를 나누는 일도 불가능하다. 버츄얼 아이돌에게서 SAC가 흔히들 관찰되는 것은 그때문이 아닐까. 존재의 흐름은 허상이고, 아바타를 구성하는 건 ‘바깥’이다. 결국 사라지지 않는 건 조각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