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Dec 10. 2024

[세계]의 시대에 디스토피아/포스트 휴먼을 읽는다는 것


영화와 유령성이라고 말하면 꽤 멋진데, 괴이로서의 영화라고 말하면 뭔가 좀 이상하게 들린다. 영화를 정말로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로 여겨서인지, 아니면 그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인지 잘 모르겠다. 유령은 살아있던 존재임이 확실하므로 우리 세계 안에 있는 존재라면, 괴이는 의식의 사각지대에서 출몰해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이면을 ‘경고’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즉 유령이 살아생전 ‘육신’을 가졌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기에 어느 정도는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반면, 괴이는 전후 맥락이 부재한 채 갑작스럽게 등장해온다는 점에서 공포스러운 면이 있다. 영화는 우리 세계의 외곽에 자리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투영하고, 인식의 바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괴이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는 물론 영화가 우리 세계에 속하는지 아닌지 여부를 따라 갈릴 의견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영화가 우리 세계와 분리된 객체임을 전제하고 싶다. 영화를 보며 한 감정을 느끼는 건 우리가 아직은 이 세계에 흥미를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부류의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서로 상호 간에 소통하면서, 때로는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거나 아니면 아예 상실하게도 한다는 점에서 이상현상의 한 부류인 듯 보인다. 혹은, 영화가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여러 세계를 가정해서 보여주기에 대체현실의 한 부류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의견이 있기도 하다. 이 경우 영화는 그 끝에서 ‘풀려남’과 함께 우리는 원위치로 되돌려놓기에 상실감과 깊이 연관된다. 확실한 건 영화가 한 시작과 끝을 구분 짓는 일이 ‘깨어남’과 ‘끌어안음’이라는 두 개 가치를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그 안에 하나의 공간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화는 일종의 [세계]에 해당한다. 한 존재에 무작위적으로 발병하는 ‘연대’를 유도하면서 말이다.  


2011년의 이그노벨상은 1992년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다고 주장했던 이장림 목사에게 돌아갔다. ‘세계 종말을 열정적으로 주장한 사람들’로서 공동 수상했는데, 2020년대를 기준으로 하면 이 상은 우리 모두에게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죽음보다 세계의 멸망을 상상하는 일이 더 쉬워졌기 때문이다(마크 피셔). 판데믹이라던가 트럼프 당선이라던가 하는, 이해의 정의를 넘어선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종말을 주장하는 일은 이해하는 정도를 넘어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될 만큼 당연한 일이 되었다. 예전이라면 “에이, 종말이란 게 정말 오겠어?” 정도였다면 지금에서는 “차라리 종말을 마주하는 편이 더 현실적인 일인 것 같다.”는 의견이 더 많다. 마치 마블 영화에서 지구가 신의 알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 시민들처럼, 판단의 준거가 되어야 할 현실이 도리어 실재들에 잠식될 때, 리얼리즘이란 것은 효력을 잃고야 만다. 이를 따라 2010년에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 바로 사변적 실재론이다. 이 사실론은 간추려 말했을 때 ‘주체’가 아니라 ‘객체’의 존재에서 출발하자는 것으로, 인간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세계가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예를 들어 어딘가에 정말로 좋은 세상이 있다면 이를 곧바로 인식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낙원이 없다고 믿는 것보다 낙원이 있다는 가정하에 이를 찾아가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꿈속에서는 자신이 꿈을 꾼다는 점을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꿈을 꾸는 일이 ‘깨어남’이라는 가치 판단을 수반한다는 걸 잘 안다. 사변적 실재론에서 ‘바깥’은 무(無)가 아니라 ‘정의되지 않은 영역’이다. 이에 관측하는 이의 의지와 시기가 중요한 여건으로 작동하며, 이때 판단능력은 사실 관계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수행에 관한 실천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다른 것들의 중첩이라는 주장도 이와 같은 생각을 내포한다. 평행우주론은 분기에서 탈락한 세계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분화해갈 뿐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세계에서 시야에 보이지 않는 것은 한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로서 예비되어 있을 뿐이다. 행여나 이런 생각이 그저 상황을 낙관하기만 하는 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따금 우리는 자신이 될 수도 있었던 미래를 상상하기도 하지만, 이런 상상들은 우리가 구상하고 관측하는 한계 안에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세계에 근간한다. 근대에 접어들던 시기에 우리는 세계라는 말을 ‘이곳’이라는 말을 공유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다는 점으로 받아들였으나, 현대 사회에서 [세계]는 ‘이곳’을 대체하지 않는 여러 다른 세계들에 관한 포괄적인 이해와 반영을 뜻한다. 평행우주론은 분기된 것들의 탈락을 뜻하는데 반대로 그와 같은 탈락을 실패로 보지는 않는다. 오늘날 연결이라는 말은 매끄럽게 봉합되어 ‘바깥’을 구상할 수 없게 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며, 반대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품어보려는 상냥함이 있기도 하다. 결국 [세계]는 확장 가능성의 절대 분포가 아니라 자기 구획의 일종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개인과 세계의 직접적인 연결과 동질화’를 다루었던 세카이계의 정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나’는 메신저 챗 안에서도, 회사 내의 조직도 안에서도, 학급 명부에서도, 관료제 인트라넷의 목록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편재한다. 동료들이 당신을 지칭할 때 그들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을 본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계를 말하는 일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서의 세계, 대문자 [세계]다. 본래 있는 것을 아직 목격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보다 분절할수록 더 섬세해지고 커져만 가는 [세계]인 것이다. 


누군가는 사람들이 점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기 때문에 더는 예전처럼 하나의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도 본다. 개인주의가 발달했고, 취향이 세분화함에 따라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게 된 것으로도 보인다. 말하자면 우리가 기이하고 으스스한 것을 실패로 바라보지 않고, 동정이나 연민을 보내지 않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처럼 원치 않게 살아난 것들을 괴물처럼 여기기보다 이를 이루는 여러 존재들의 교집합으로 바라보게 된 건, 한 세계의 합이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까닭이다. 한 세계의 깨어남이 외우주가 아니라 올려다보이는 하늘을 확장하듯 [세계]는 간극에 관한다. 무언가를 바라보려면 서로가 너무 붙어있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둘 사이에 놓인 게 무엇인지를 알 수도 없다. 그냥 이 둘은 서로 독립되어 존재하지만 끝내 하나의 원리로 엮여있다는 점만이 증명 가능하다. 비슷하게 사람들 사이에선 서로 성장환경으로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이룸에도 상호 간에 얽힘 관계에 들어서는 일이 있다. 이들은 우리 세계가 점점 확장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세계를 발견할 뿐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를 두고서 한 세계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수축한다고 말할 수나 있을까? 어느샌가 사람들 사이에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공감능력의 발휘인 줄로만 알았지만 서로 다른 것에서 닮은 면을 발견하는 일이 꼭 끌어안기에 적합한 모양을 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 오히려 ‘나’를 이루는 것들에서 벗어나 이를 한 세계의 갈래로 수축하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마치 자신이 지켜내야 할 것을 붙들어 매듯, 끌어안음은 한 세계를 명확히 하는 과정이자 점진적인 쇠락의 과정이다. 


마크 피셔의 서술로 흔히 인용되는 이 사실이 종말을 자연스럽게 사유하는 세카이계와 연결될 때 우리가 해볼 법한 말이 있다. 얼마나 멀리 가야만 우리는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쉬운 요약은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이 ‘바깥’을 사유하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범유행을 예로 든 피셔의 관점이 종말을 실질적인 ‘바깥’이 아니라 하나의 내부로만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바깥을 사유하는 능력의 상실이 의미하는 바는 “대안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피셔의 주장이 자본주의 사회에 관했다면 사변적 실재론은 더 넓은 범위에서 그와 같은 ‘대안’을 상상해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종말이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자라면, 한 세계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그 또한 매한가지일 테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종말은 모든 것의 끝, 상상할 수 있는 것의 마지막 순간을 뜻하지만 바꾸어 말한다면 종말 또한 그 세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종말이 이루어지면 이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는 즉 종말이라는 게 한 [세계]에 포섭된 존재임을 보여주며 이를 따라 종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도리어 세계의 끝을 마주하기를 전적으로 회피하려 든다. 마치 꿈이 꿈 안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갖듯, 꿈은 현실에서 성립하지만 반대로 현실의 대안이 될 수 없으므로 생존 가능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꿈은 결국 내부의 외부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바깥’은 정말로 미지의 공간이 된다. 우리가 여태껏 알고 있던 외부도 결국 내부에서만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다. 오늘날 [세계]라는 말은 그 점에서 ‘나’와 바깥의 직접적인 연결이 아니라, ‘나’와 ‘외부’를 동등한 자리에 두고서 서로 같은 목표를 향해가는 여정을 다룬다. ‘대안’이라는 말은 그 자리를 대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나’와 ‘너’를 연결하는 매개물을 뜻한다. 


사적으로는 이 말이 인정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게 되어버린 상황을 뜻한다고 생각된다. 딱히 답을 강요한 건 아니지만 이것 말고는 딱히 선택할 게 없으니 이거라도 손에 쥐어야 한다고나 할까. 바깥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내부를 구성하는 일은 공공의 적이라는 제3의 대상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허용된 범주에서의 외부를 내부로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판데믹 같은 대형사건이 터지면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던 두 세력이 잠깐 손을 잡는 일이 꽤 흔하다. 애초에 이곳 세계가 없으면 서로 간에 분쟁 또한 일어날 일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이 싸움을 이어가려고 한 세계를 지키려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들이 마지막에 내몰린 구석으로서의 내부를 다룬다기보다 본래부터 서로에 취했던 상관성을 [세계]를 매개 삼아 겉으로 드러내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종말을 다루는 장르는 세상이 황폐화된 후에도 결국 한 세계가 이어지는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우리가 ‘바깥’을 상상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대안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대안이 우리가 활용하거나 나아갈 수 있을 성격의 실질 공간이 아니라 쓰루패스를 통해 공간을 창출하는 정도의 ‘능력’으로 사유될 뿐이다. 그러나 상상할 수 있다면 그건 더는 외부가 아니며, 종말은 서로에 깨어남 즉 하나의 [세계]를 구상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볼 만한 여지가 있다. 세계의 종말을 손쉽게 생각할 수 있게 된 세상은 그 자신의 존재원리가 종말에 속하기에 도리어 종말에 포섭되지 않는 삶을 다룬다. 이때 중요한 건 그것들과 연결되는 방식이고 또한 그에 다가서려는 노력이다. [세계]는 나와 세계의 직접적인 연결에서 공감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공간에서 직접적인 연결을 창출한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변화된 기능이라 할 수 있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