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글을 쓰면서 들었던 말 중에 인상에 남았던 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글이 따듯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벤야민을 닮은 글쓰기 방식이라는 점이다. 정말 감사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는 벤야민을 생각해보게 된다. 벤야민은 어떤 사람일까? 벤야민이 위대한 철학자인 것은 예외 상태를 정의하고, 그 의미를 역사적 지평으로 확장했다는 점에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를 망설이며 과거와 이별하기를 두려워하는 순간을 그는 말했다. 그는 먼 미래에 사로잡히거나 과거에 발목이 붙들리지 않았으며 현재를 항상 하나의 예외로서 바라보았다. 벤야민은 인간이 과거를 복원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보면서 이를 발굴하는 것이 역사가의 한 태도라고 말하지만, 반대로 그와 같은 과거를 구하는 것은 현재라고 말하면서 그에 ‘응답’하는 것이 수집가의 태도라고 말했다. 이를 따른다면, 역사가는 과거를 수복한다는 점에서 혁명가에 가깝고 수집가는 「행복」을 쫓는다는 점에서 「각오」한 자이다. 역사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한 과거를 각오한다는 뜻에서 이를 정해진 것으로, 붙잡아 둘 수 있는 목표로 삼는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가가 혁명가인 것은 자신이 한 과거를 붙잡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과거를 ‘지나간 것’이 아닌 한 [세계]의 바깥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세계]를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의 바깥에 속해있기에 이를 손에 쥘 수 있다고 본다. 이때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은 이를 섭취하는 등으로 몸에 체화하는 일로 이어진다. 바꾸어 말해 혁명가는 과거를 잃어버린 존재이며, 어떤 사례로든 자기의 바깥에 밀려나 버린 과거를 되찾으려 하는 존재인 것이다.
자기에서 나뉜 다른 인격과 대립하는 일은 매체에서 흔히들 묘사하는 클리셰 중 하나다. 대개 도플갱어 설화의 공식을 수용하는 이 설정에서 우리는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되는 일이 많다. 자신의 악한 면을 분리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떼어내고 싶은 나의 일면’을 묘사하는 일은, 이를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야기 안과 밖의 독자에게 캐릭터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작가가 한 인물의 내적 변화를 묘사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역사가는 역사를 살아가는 존재로서 그 안의 일을 서술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흐름 안에서는 지나간 것과 구성되는 것이 서로 분간되지 않으므로 자기를 잃어버리는 일에 소극적이 되고, 또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흐름 안에서 주체는 잃어버리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 양쪽 모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으며, 그래서 「각오」할 수 없다. 다른 한편 한강은 2024년 노벨 문학상 연설에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물음은 우리가 과거를 관찰하는 데 필요한 것을 생각해보게끔 한다. 과거를 구하려면 그를 바깥으로 밀어내야만 한다고, 바꾸어 말해 우리가 스스로를 바꾸고 싶다면 어쩔 수 없이 밀쳐내야 하는 ‘나’ 자신이 있다고. 우리가 혁명가가 되기를 바라는 건, 그렇게 떨어져 나간 자신의 일부가 타의에 의해 상실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타의에 의해 상실된 것을 다시 본래대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두고서 우리는 정상화라 부른다. 그게 타인이든 간에, 아니면 세상이 나를 멋대로 하기를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에서의 타의인지든 간에, 정말로 중요한 건 돌아가려는 의지다.
죽은 자에겐 삶에의 의지가 있다. 또한 과거는 현재화하려는 의지가 있다. 가령 꿈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나 되려는 것을 보여주지만 정작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 안에서만 자신을 구축하게 된다. 즉 꿈세계는 그 자체로 거대한 과거이며 이를 실현하는 것은 그런 과거를 현재화하려는 노력이다. 꿈을 꾸는 것은 우리가 “과거는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구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특히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의 잔존을 설명하면서 벤야민의 ‘깨어남’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서술한다. “민중들은 (…) 자신들 기억의 내재적-물질적이고 신체적인-힘을 형성하는 자신들의 잔존으로 살아남는다.” 그는 프리모 레비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은 한 사람을 다시 보기를 희망하는 일이라고도 말한다. “민중들은 항상 사라질 위험에 노출된다.” 그러나 이 위험은 타인의 시선 속에 내포된 만남을 동반하기에 다시 보기에 관한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과거가 현재를 돕는 것은 결국 다시 보기를 희망하는 것, 자신을 바꾸고 싶지만 존재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할 때 ‘현재’는 우리가 다시 돌아올 곳으로 지정하는 효과가 있다. 꿈을 꾸는 사람은 그 안에서는 타인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을 이내 깨달아 고립과 단절이 가득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과거를 기억하려는 이는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고통스러운 현실에 깨어나려 한다. 이러한 뜻에서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지를 묻는 건, 황금빛 좋은 꿈에서 깨어나 흑백의 세계로 돌아오려는 시도이다. 비록 꿈에서 깨어나더라도 우리는 그 바깥, 꿈과의 연결고리를 잃지 않을 것이다.
현대 과학에서 시간을 말할 때는 과거와 현재만이 있을 뿐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를 가리키므로, 우주의 [바깥]을 말하는 일이란 불가하다. 이분법은 많은 경우 오류를 낳지만, 흥미를 단설하는 면에서 이런 물음을 이어가려 한다. 예를 들어, 꿈이 언젠가 깨어지기 마련이듯 상상에도 가능한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 이는 깨어남이 수복의 과정임에도 두 위치계의 즉각적인 변화로 이해되는 면이 있고, 이를 따라 두 곳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는 과거가 관찰자의 시점인 현재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지연되므로, 과거 또한 다른 관점에서의 [바깥]이 될 수밖에 없다. 소리의 전달 속도보다 더 빠른 물체가 충격파를 발생하는 일을 떠올려보자. 이 안착은 항상 모종의 충격을 동반한다. 과거가 현재에 다가서는 순간 우리는 작은 깨어남을 얻는다. 과거는 현재에 닿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 지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과거가 현재를 구한다는 상상은 전적으로 두 곳을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하기에 가능하다. 허나 우리가 꿈을 두고서 깨어남을 말하는 건, 이를 자신에서 분리하려는 것이지만 이를 버리고자 함은 아니다. 깨어남은 위상이 변화하는 일에 간극을 겪고, 또 그만한 지연이 발생하므로 이를 단절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깨어남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곳에서 희망이라는 이름의 [바깥]을 발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잔존의 기능이다. 마찬가지로 반딧불의 명멸이 어둔 밤에서만 관찰된다면, 혁명가에게 과거는 [바깥]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만큼, 그 이상의 속도를 내야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가치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는 군중들이 거리에 나와 가두행진을 할 때 자기만의 특색을 지닌, 개성 넘치는 깃발을 제작하고는 한다. 이 깃발들의 특징은 자신의 입장이 어떠한 단체와 협회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게끔 단순한 인터넷 밈부터 매체에 등장하는 가상의 집단 등으로 꾸려진다는 점이다. 자신의 입장을 꾸리는 일에서 자기를 대표하는 것을 지운다는 건, 무언가를 말하면서도 그걸 자신의 이름을 통해 발화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상에서 익명을 사용하듯, 직관적 현실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면서도 동시에 그에 환원되는 영향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이런 깃발 사용은 의미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군중들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전환한다는 뜻에서 깃발 사용은 한 인간의 연결을 외부에 전시하는 [바깥]으로서 작동한다. 연결은 내부로 집결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하나의 바깥을 공유한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가령 오늘날 키보드와 같은 입력 매체는 무언가를 눌러 신호를 입력하는 것만큼이나 스프링이 반발하며 다시 거치게 되는 경로에서도 측정값을 얻곤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입력하는 것만큼이나 어딘가에서 산개하는 것 또한 의견을 전달하는 한 통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벤야민은 지연에서 깨어남을 발견했다. 그리고 입력수단은 물리적으로 입력된 것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미끄러지는 과정을 신호를 전달하는 수단으로도 사용한다. 여기서 예측되는 것은 앞으로 다가오게 될 입력시기일 뿐, 언제 자리를 나서게 되는지가 아니다. 행동을 표현하는 일을 효율화하는 알고리즘은 가공의 미래를 항상 예측하기에, 즉 「각오」하기에 그 자신을 순간으로, 즉각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