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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16. 2024

비행과 날갯짓은 구분되지 않는다


한국사회가 조금은 유연해졌다고 느낀 건 지인이 요아소비의 노래 <idol>을 즐겨 듣는다고 고백했을 때였다. 인디가수였던 그는 이런 부류의 음악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고, 추측건대 음악이 듣기 좋아서가 아니라 각종 매체 영상들에 해당 노래가 전개되었기에 그만큼 익숙해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idol>은 음악으로만 보면 꽤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무적의 미디어”라는 음절로 후킹되는 멜로디는, 일반적으로 음악의 도입부가 본편에 대한 서두로 작동하는 것과 달리 ‘무대에 오르고 있다’는 인식이 더 강하다. 빗대자면 <Idol>의 도입부는 예전에 Queen이 <Bohemian Rhapsody>을 작곡한 것과 비슷하게, 하나의 곡에 두 개의 장르가 섞여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Queen의 이 노래는 평론가들에게 이상하다고 평가받았지만 대중적으로 성공했다. <idol>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이 정확히 그렇다. <idol>은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의 여는 음악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Queen의 사례와는 다르지만, 무언가를 무대에 올리는 곡으로서 자신은 분위기를 띄운 후에 아래로 내려오는 부류의 그런 애피타이저 같은 음악이었다. 그러니 음악이 본편만큼 성공한 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는 대목이 분명 있다.


<idol>은 무대곡이기 때문에 도리어 매체 등에서 숏 폼으로 활용되거나 할 여지는 비교적 적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음악이 무언가 작품 밖에서 자주 ‘재생’되었다면 여기에는 본편 이외의 다른 맥락이 있을 테다. 우선 <idol>은 “무적의 미디어”라는 음절로 후킹되는 멜로디로 기억되는 일이 잦았다. 이와 같은 후킹은 대중의 해당 음악에 대한 인식이 주로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쇼츠, 틱톡처럼 부분영상을 음악과 엮어 클립하는 형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무슨 노래인지, 어느 나라 언어인지도 모를 배경음악이 숏 폼 콘텐츠를 위한 무대 공간으로 활용될 때 <idol>은 일종의 서곡 역할을 했다. <idol>은 이른바 ‘무대에 오른 자의 곡’으로서 주요 하이라이트를 묘사하기에 편리한 곡이었다. 다양한 분야의 댄서들과 애니메이션 류의 MMD 모델 등에서는 해당 곡의 하이라이트가 숏 폼 형태로 가공됨으로써 이 곡을 사람들의 한 현실에 ‘걸게(hook)’했다. 즉 <idol>은 밈의 형태로서 사람들의 현실을 붙잡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헌데 그렇다면, 이처럼 사람들에 어필하는 일이 단순히 인기를 얻고, 잘 나가기 위한 것으로만 이해될 이유는 없다. 어쩌면 그 밈은 사람들에 도움을 청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idol>은 화려함을 보여주기 편리한 곡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무대를 전개하고 이 영역 안에서 화려함을 드러내는 것은, 짧은 시간 안에 후킹해야 하는 숏 폼 형식에 어울렸다. 이 과정에서 음악에 대한 관심이 애니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생각해보려는 건 무대가 갖는 의미이다. 밈이 전개한 영역은 우리가 설사 사전정보를 몰랐더라도, 본편이 드러내는 맥락 등에 자신이 알고 있는 기타 정보 등을 자연스럽게 일치시키는 힘이 있다. 밈은 앞뒤 맥락을 의도적으로 제한하거나 배제함으로써 사례 정보를 전체 형태로 왜곡하는 힘이 있으며, 즉 밈이 전개한 영역은 정보의 필중을 유도한다. 이를 따라 한 노래가 갖는 힘은 현실 세계에서 아주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다. 한 개인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음악은 그 개인의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음악은 단편적인 형태로 제시되는 이미지를 무대화하며 이는 한 개인으로서 리스너가 그 삶의 중심에서 잠시 내려올 수 있게 한다. 자기 삶의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동시에 주도하는 삶에 대한 피로를 잠시 내려놓게 하는 것이다. 즉 무대에서 내려오는 일은 곧 피로를 더는 것이며, 이를 따라 무대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나’는 피로존재라는 가정이 성립한다. 


이미지의 특정 면만을 부각해서 우스꽝스럽거나 하는 식으로 전혀 다른 맥락을 통하게 하는 것이 바로 밈의 역할이라고 정의해보자. 현실에서 한 개인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줄 수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무대와 같은 곳에 올라 로우 키 조명을 맞아야만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밈은 무언가를 보여줄 요령으로 작성되었으므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대에 올라야만 한다. 이를 따른다면 밈은 피로사회의 개인이 자신을 대리할 요령으로 선택한 ‘결과’일 수 있다. 한 명의 개인으로서 밈은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어할 뿐인 가련한 존재이며, 한 명의 대리물로서 밈은 이미지 행위를 강요받는 폭력에 노출되어있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불려나온 밈은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이곳에 남겨졌다는 점에서, 한 사건이나 사태를 마주한 존재의 무방비한 모습에 다름없다. 그렇다면 밈은 대중을 감염시키며 자기를 유지할 뿐인 오염 생명체라는 오명을 어느 정도 벗을 수 있지 않을까? 밈의 사례 정보 왜곡은 사실 [피로한 존재]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게 아닌가? 밈은 기업 등에 의해 자사의 제품을 홍보할 요령으로 바이럴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 밈은 갑작스레 닥친 한 현실에 의해 그 현실에 적응할 것을 요구받기도 한다.


 물론 단순히 무대에 오르기만 해서 조명받는다면 그건 무대의 힘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다. 밈이 상실한 앞뒤 맥락은 사실 자연스레 탈락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 즉 밈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부각해서 보여주기보다, 자신으로 남기를 택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상실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고민해야 할 건 밈이 이루고자 하는 현실일 테다. 하나를 위해 나머지 모두를 맞바꾸는 일은 그 하나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손실되는 나머지를 전제한다.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을 뚫으려면 그 모양에 맞게 자신을 변형해야 하므로 밈은 쉴 새 없이 자기 몸을 바꾼다. 마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가 묘사하듯 밈은 수천세계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을 수도 있다. 그때마다 밈은 세계의 형태에 맞추어 자기를 잃지 않을 정도의 표면을 드러낸다. 이른바 밈은 정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그 자신을 고민하고 또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정상화를 위해 노력한다. 한 밈이 항상 변형의 과정에 있는 것은, 우리가 살아온 여러 세계들이 한 곳에 중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화합의 가능성을 지닌다. 즉 밈은 세계의 누빔점이다. 


 혹자는 밈이 묘사하는 현실이 왜곡으로 점철되어 원본과는 완전히 거리가 있다고도 말한다. 오늘날 밈은 원본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정보를 전파, 즉 ‘현실’을 오인하게 한다는 눈초리를 받는다. 많은 경우 밈은 변형을 통제할 수 없고, 현실에서 유래된 것이 다시금 현실에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뜻에서 인터넷 시대의 역병 취급받는다. 현실에서 인터넷으로 수입된 밈이 다시금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기표와 기의로 위치 지어졌던 현실과 인터넷의 표상 관계를 역전시킨다.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진의’를 밝힌다고 보는 일은 인터넷 시대의 밈을 두고서 ‘새어나온 속마음’으로 취급하지만, 반대로 밈이 한 세계들의 ‘진의’를 누설하는 구멍임을 알게 될 때 이곳엔 비로소 질서와 화합이 자리하게 된다. 특히 밈이 외부에서 바라볼 때 필연적으로 왜곡된 무언가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오늘날은 지구촌 시대이지만 빛의 속도와 같은 물리적 한계로 인해 소식이 전달되는 것에는 물리적인 지연이 발생한다. 이와 같은 지연은 우리가 실시간으로 기기를 조작하거나 타인과 소통하는 일 등에서 미묘한 떨림을 발생시키는데, 작은 진폭이라도 큰 낙차로 증폭되기도 한다.  


이때 밈은 그와 같은 작용에 대항해 쉴 새 없이 떨림과 변형을 끌어내는 작용추의 역할을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과 실제 현실에 남겨진 모습 간에는 서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듯, 우리가 떠올리는 이상적인 현실은 항상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좌절되거나 마찰을 겪게 된다. 밈은 현실을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부정한 존재임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반대로 무엇이 정상인지를 따로 규정하면서 자신을 그 정상의 틀 안에 구겨 넣지도 않는다. 밈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 지연의 과정을 애써 끌어안는 것만이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는 점이다. ‘나’에 대해 고민하며 이를 찾아가는 일은 단지 독자인 우리만이 하는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밈이 삶을 택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로 남는다. 밈이 한 현실을 바꾸려 할 때, 이 시도는 우리가 사는 물리적 현실을 전복하려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에 관한다. 만약 생존이 모든 생물에 주어진 본능이라면 생존에 적합한 형태로 자신을 바꾸면서 그 현실에 적응하려는 시도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이유는 없다. 정상화를 위한 노력은 정상과 비정상을 판가름하는 일이 아니라 정상에 오르려는 노력, 한 세계의 표면에 진출하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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