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에 올라온 오진우 평론가의 「한국영화는 현재 ‘부모 찾기’ 중이다」를 읽었다. 이 글의 두 번째 문단은 다음처럼 시작한다. “2025년 상반기에 개봉한 한국영화에서 찾은 묘한 공통점은 ‘부모’를 찾는다는 것이다. 부모를 찾는 이유는 현재의 삶이 버겁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들었던 기시감은 이내 안시환 평론가가 <사냥의 시간>에 대해 썼던 글 「'사냥의 시간' '인간수업'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속 인물의 선택에 대하여」로 초점이 옮겨갔다. 이 글에서 안시환은 이들 세상이 ‘거대서사’ 이후의 세계처럼 보인다고 말하며 이야기의 바톤을 김병규 평론가에로 넘긴다. 이어 김병규는 ‘부모가 있는 느낌’을 그리워하는 작중 인물의 모습은 ‘그런 세대에 대한 진부한 해석’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는데, 한국영화 담론은 정확히 이런 느낌이다. 1995년이라는 원본이 있으면 이걸 토대로 2차 창작을 무수히 쏟아내는 동인설정의 시대, ‘거대서사’가 흑역사가 된 상황에서 온갖 평행우주가 대두하는 이 시대는 거진 ‘동인지’라 보아도 과언은 아닐 테다. 어차피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담론 자체에 관한 여러 구상들이 나오는 걸 보면 모두가 자기만의 설정을 즐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안노 히데아키가 만든 신판 <에반게리온>이나 <건담: 지쿠악스>처럼 그저 자신이 바라는 ‘부모’의 모습을 양성하는 이 모습이 바로 한국영화의 21세기다.
서브컬처에서는 소위 말하는 성인 오타쿠들의 유아기 퇴행을 “‘부모’를 향해 담론을 고정하고 그 안을 자유롭게 활보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 진단하고는 한다. 위의 글에서 안시환은 <사냥의 시간>의 청년들이 ‘이곳 아닌 삶’을 꿈꾸며 어떠한 ‘바깥’을 갈구한다고 지적하는데, 다소 엉성하며 유치하기까지 한 이 활극에서 ‘부모 찾기’도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다. 정해진 기원에서 출발해 두서없는 미래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불확실한 기원에서 출발해 확고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일 말이다. 하지만 이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같으며 단지 양극단의 어디에 자리하는지만 다를 뿐이다. 가령 DC코믹스의 배트맨 시리즈 중 ‘킬링조크’를 보면 조커의 불분명한 농담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배트맨의 묘사가 나오는데, 이는 리들러의 수수께끼와는 달리 두 인물이 서로 양극으로 분리된 존재임을 말해준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은 일종의 양극성 성격장애를 앓고 있고 한국영화도 그렇다. 최고로 High하거나 너무나 Low하거나 둘 중 하나만을 갖고서 극을 끌어가는 ‘그’는 사실 무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니 억지로라도 이야기를 끌어가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점에서 한국영화의 ‘부모 찾기’는 ‘원본’을 발사대 삼아 자기만의 동인설정을 풀어놓으려는 동인지에 가깝다. 정말로 부모를 찾으려는 게 아니라 ‘부모’가 없다고 선언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기원을 ‘재정립’하며 ‘새로 쓰기’를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개변이라고나 할까. 일반적으로 세계를 개변하는 일은 현실 위에 어떠한 현상이나 구상을 그대로 덮어씌움으로써 세계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일상을 재배치하는 일을 가리킨다. 이는 대개 마법 같은 무언가로 묘사되곤 하지만 갖고 있던 것을 재발굴해내거나 새로운 기술 개발 등으로 인식의 연결고리를 새로 쓰게 되는 것으로도 현실에서 흔히 일어난다. 스마트폰의 발명 등이 대표적인 예다. 영화판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부모’에 대한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아서 ‘아무런 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자책하지만 사실은 ‘부모’라는 개념을 발명한 쪽에 가까워서, 작지만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한국영화가 <전지적 독자 시점>이나 <좀비딸> 같은 작품에 원작을 운운하는 건 그런 뜻에서 원작을 ‘부모’로 바라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정말로 비교해서 바라볼 대상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단지 현재의 삶이 버거울 뿐이었다. 이 안에서는 원작에 대한 팬들의 의견도 대중을 위해 이야기를 가공하는 쪽의 의견도 뚜렷하지 않다. 이미 비교할 수 있는 ‘한국영화’라는 원본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자기만의 동인설정이 되고야 만다. 이런 상황에서는 원본을 다른 무대로 옮기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귀멸의 칼날>처럼 흥행이 확실한 세계가 있다면 이를 어떻게 옮길 것인지와 같은 문제 말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귀멸의 칼날> 시리즈는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약한 작품이다. 군데군데 놓고 보면 이야기의 흠결이라 부를 만한 건 많지만 액션이 화려해서 그걸 덮어버린 형태다. 중요한 건 한 작품을 구성하는 것에서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며, 반대로 이야기만으로도 전부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작품은 여러 요인이 균형을 이루며 복잡한 평가를 이루어내므로, 강점과 약점을 지적할 수는 있어도 ‘못 만들었다’와 ‘잘 만들었다’를 말하는 일은 어렵다. 바꾸어 말하면 여러 요인들이 엉성하게 구성돼있으면 ‘못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귀멸>은 못 만든 작품은 아니며, 도리어 원작대로 잘 만든 작품에 속한다. 영상화된 <귀멸>은 원작을 시각적으로 보강했고 팬들을 넘어 대중을 만족시켰다. 영화로 치면 미장센이라고나 할까. 물론 시각적인 것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주는 일은 언어 이전의 문제, ‘보면 안다’는 직감을 건드리기에 무척 사적인 면으로 치부된다. 누군가가 “죽음으로 맛있는데!”를 외칠 때 다른 이는 “죽음으로 없는데!”라고 평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건 그런 사적인 것을 이겨내는 구성이다. ‘전체’는 ‘부분’을 이길 수 있다. 마치 모에의 포스트모던적인 정의처럼 ‘집합’은 사실 ‘개별’로 설명되지 않으며 도리어 ‘집합’인 채로만 바라보아질 뿐이다. 여하튼 이 설명에서 말하고 싶은 건, 작품에는 ‘좋다’와 ‘나쁘다’가 있을 수 있어도 ‘옳다’와 ‘그르다’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원작과 똑같이 만들어달라는 팬들의 마음이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 도리어 해가 되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이 글의 논점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그 자신의 창의적인 변형이 원작팬들의 요구로 저지되거나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귀멸>의 극장판을 떠올리게 했는데, 주변에서 ‘일본의 TVA를 바탕으로 한 극장 애니메이션은 미국의 디즈니나 픽사 같은 작품과 달리 TVA의 늘어진 판본에 불과해보인다’는 의견을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한성> 같은 경우는 전투 한 번에 회상이 두 번정도 들어가는 식으로 반복되는 구조로 짜여 TVA 구성처럼 보이는 면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건담: 지쿠악스>나 <단다단: 사안>처럼 TVA 몇화를 묶어 극장에서 선행 공개를 하거나 <진격의 거인 파이널 시즌>처럼 파트별로 나뉜 극장판본을 TVA로 선행 공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 사례는 오늘날 일본 애니메이션이 ‘티브이 방영’이라는 이점이 아니라 단순히 ‘분절’된 판본이라는 점만으로만 이들을 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영화에서의 연작이나 ‘챕터’가 사실상 TVA에서의 분절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보면 <무한성>은 작품 하나라기보다 하나의 분절된 판본에 가깝다. 마치 처음부터 TVA 재편집을 염두에 두기라도 한 듯, 작품에는 높낮이가 반복되는 구성이 여러 번 변주되면서 일관된 평가보다는 부분적 ‘형상’으로서 감정을 끌어내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 ‘전체’의 형상으로 파악되는 ‘부분’이 있기에, ‘무한성’은 그냥 ‘보면 안다’는 쪽, 작품이 내내 말하는 ‘직감’의 영역에 있다. 이야기가 두서가 없다고 하는 게 아니라 아카자나 탄지로가 말하는 ‘지고의 영역’과 ‘내비치는 세계’에 관한 사고실험을 진행해보려 한다. 작품 내내 언급되는 ‘본능적으로 안다’는 건 귀살대가 무잔이나 코쿠시보가 같은 강자에 품는 감정이면서, 무잔이 요리이치에 느꼈던 공포이자 탄지로가 귀살대를 비롯한 혈귀들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과 같다. 이들 감정은 무언가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그에 앞서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는데 여기에 ‘존재’의 이유란 없으며 그저 있는 그대로도 모두가 소중할 뿐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기에 이 세상이 태어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원작과 영상화의 관계는 정확히 이것과 같다. 영상화는 원작의 한 면을 다른 매체로 옮겨두는 게 아니라, 원작을 중심 삼아 존재의 지도가 안으로 끌려가는 형태에 가깝다. 이 형상에는 마땅히 정해진 운동이 있는 게 아니라서 지정할 수 있는 모양이 없다. 분명 원작의 파생작으로서 영화를 대한다면 일관된 평가기준으로밖엔 따라갈 수 없겠지만 도리어 ‘바깥’을 끌어들인다면 이 문제는 다르게 볼 여지가 있다. 무엇이 원작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무엇을 생각할 여지도 없을 만큼 촘촘하고 빼어나게 안을 채워두기만 하면 된다.
원작을 다른 매체로 옮겨둔다는 건 ‘잘 만들었다’와 ‘못 만들었다’만 있을 뿐이며 ‘옳다’와 ‘그르다’로 나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형상’은 ‘강하다’와 ‘약하다’로만 나뉠 뿐 그것이 ‘가능하다’거나 ‘불가능하다’로 나뉠 게 아니다. 적어도 이미 존재하는 것들은 태어난 이상 무로 돌아갈 수 없고 마찬가지로 희망이라던가 절망이라던가 하는 것도 완전히 저버릴 수 없는 가치들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감정을 말하는 방식은 없는 것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본래 갖고 있던 것을 더 ‘조절’하는 것일 테다. 이 점은 작품이 강조하는 주제의식인 ‘노력’의 중요성과 맞물려 재능 여부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갈고 닦는 일이라고 말한다. 재능 여부를 일관되게 평가하는 일보다 자신이 품은 것에 ‘형상’을 부여하는 일이 우선시돼야 한다. 원작을 충실히 이행한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가 말하는 한 부모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들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에서는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확실한 과거로 퇴행하는 게 더 낫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각오’할 수 있으니 앞을 바라보는 일도 더는 눈이 부시거나 두렵지 않다고 말이다. 오히려 모든 걸 불살라 아무런 것도 남기지 않는 게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미래는 경험 이전에서만 구상될 수 있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