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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이 서사를 압도할 때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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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프로 레벨, 스토리는 만화를 얕보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 말은 일본의 만화 <침략! 오징어 소녀> 심사 당시 모 심사위원이 남긴 것으로, 현재는 인터넷 밈으로 더 유명하다. 통칭 ‘얕보고 있다’로 축약되는 이 말은 아이돌판으로 보면 ‘비주얼이 뛰어난 데 반해 노래나 춤 실력이 떨어지는 사례’를 가리킨다. 그림작화나 구도가 좋은 데 반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실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단순히 그림만 있는 작품도 작품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볼 건 아니지만, 이야기가 약하면 아무래도 그 안에 무언가를 담기는 어렵다. 즉 ‘기억’되기 위함이라면 이야기를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네이버웹툰 같은 웹 플랫폼에 올라오는 신작들을 보면서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눈이나 귀를 즐겁게 하는 용도로서 ‘프로’에 가까운 그림들이 많지만 반대로 이야기로서는 깊이가 부재한 작품이 있다. 인물은 어떠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그 행위는 모든 게 결정된 인과처럼, 자기주장과 의사가 부재한다. 이 결정론적 세계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할 수 있을까? 파국을 향해가는 고립계에 불과한 이곳 세계는 일상의 반복을 겪는 몇몇 독자들에게 밟힐 만한 자투리땅조차 제공하지 못한다. 세계는 여전히 부유하는 중이고, 그리고 의미는 ‘얕게 보여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점점 더 확고해지는 취향과 함께 개인의 시야가 좁아지는 것뿐일 수 있다. 예전에는 10년 단위로 세상이 변했다면 요즘에는 1년 단위로도 휙휙 바뀌니까 개인의 취향도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소위 말하는 ‘늙어서 입맛이 바뀌었다’고나 할까. 이야기의 심도가 낮은 게 작품성과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얕본다’라는 말만큼은 확실히 돌아볼만 해서 ‘얇다’라는 말과 ‘얕본다’라는 말 간의 유사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어떠한 의도를 갖고서 이야기를 얇게 만든 것과 그냥 깊이가 얇은 건 서로 다르다. ‘이런 건 의도한 거야’라고 항변하겠지만, ‘그냥 못 만든 거야’라는 답이 돌아오는 몇몇 사례 말이다. 최근에는 <귀멸의 칼날>을 두고서 그런 말이 오가는 것 같다. 일부에서는 <귀멸>이 영상화를 진행하며 수혜를 입었다고 지적한다. 슴슴한 맛의 원작이 유포터블을 만나 화려한 영상미를 얻었다고 말하며 액션을 빼면 남는 게 없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 질문에 대한 내 답은 ‘모르겠다’다. 단점을 지적하는 일은 쉬워도 장점을 설명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귀멸>의 ‘무한성’편 국내 흥행을 보면 일주일을 조금 넘긴 시점에서 300만을 넘겼는데, 이미 결과가 나온 상황에서 이유를 말하는 건 그냥 해몽에 불과하다.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하나뿐, 원작이 있는 작품이 이만큼 흥행한 것도 매우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인터넷을 보면 “<귀멸> 안 본 친구랑 ‘무한성’ 보러 가려는 데 괜찮을까요?’라는 질문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무한성’은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도 쉽게 볼 수 편에 속한다 원작팬들에게는 늘어지는 구간이라고 평가받는 회상장면이 그들에게는 친절한 설명이 된다. 딱 봐도 나쁜 사람이 있고, 선과 악으로 명쾌히 구분 지으니 감상에 걸림돌이 될만한 것도 없다. 즉 ‘깊이’가 없다. <귀멸>에 대한 잡설 중 하나가 여기서 발생하지만 앞서 말했듯 깊이가 없는 게 꼭 작품성이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며, 도리어 ‘슈퍼플랫’한 면이 더 장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서사가 복잡할수록 빠져들만한 구석이 많아지지만 반대로 빠져나갈 구멍도 많아진다. 결과적으로 무난하게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 건 거기서 거기인게 되고 말지만 그런 작품은 대개 이를 보완할 만한 다른 게 있다. 이들 작품의 흥행은 바로 이 부분, 그때그때 먹히는 걸 잘 가져오는 일에 성패가 달렸다. 현대성이라고 하는 것 말이다. 이야기가 치밀하면 작품을 분석하는 연구자가 생기지만 이야기가 적당히 느슨하면 친근하게 다가서는 친구가 생긴다.


<귀멸>은 액션을 보여주는 일에 치중해 성공한 사례다. 이들은 평면 위에 놓인 블록들을 갖고서 무의미한 언어쌍을 산출해낼 뿐이다. 무언가 세상을 바꾼다거나 하는 식으로 대단한 말을 하지 않는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무기력한 청년이 세상을 구하는 일도 아니고, 무능력자인 누군가가 기연을 만나 세상을 구하는 일도 아니다. 그냥 (무잔의 말을 빌리면) 자연재해를 겪은 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극복해가는 이야기를 다를 뿐이다. 작품은 이야기 전체가 ‘맞서 싸운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말 그대로 극복과 성장만을 다루니까 헬스클럽에 다녀오는 것 마냥 몸이 상쾌해진다. 무언가 거대한 것을 파훼해가기보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일상의 실천에서 차분히 삶을 바꾸어가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무의미한 언어쌍은 그들이 먼저 행동(Action)을 취하기 때문이지 행동의 결과로서 제시되고 있지 않다.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것, 말로 건네는 다양한 위로보다 상대방을 끌어안는 일의 가치가 높아지는 근래 이런 짜임은 더 깊은 울림을 얻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인간의 삶과 이야기를 고립계에 두는 게 아니라 그런 고립계가 서로를 마주 보게 한다. 이런 작품들은 무언가 삶에 교훈을 준다기보다는 바쁠 때에도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게 한다.


이 대목에서 스토리를 얕본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 의미가 얕아 보이는 일은 그만큼 일상의 실천에 다가서는 걸 뜻하는 게 아닐까. 예를 들어‘비주얼’ 안에서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이 구분된다. 만화가 영상매체이기에 자연스레 흐름을 따라가는 그림 동선을 설계할 수 있는 반면, 그 안의 세계나 인물 사이 관계 등은 서로 별개의 입장으로서 위치 지어진다. 즉 그림을 따라가는 능력이 있다면 그 안의 세계를 따라가는 능력도 있다. 만약 그 세계가 한없이 투명하다면 우리는 이를 두고서 현실에 가깝다고 보아야할지, 아니면 현실을 담을만한 깊이가 없다고 보아야할지 알 수 없다. 그냥 슈퍼플랫하다고 말하면서 이야기학에서 말하는 깊이와 구분할 뿐이다. 이때 중요한 건 그림을 따라가는 능력은 다른 영상매체 등으로 파생되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그림의 기원을 동굴에 그려진 벽화로 본다면 그림의 역할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따라 일렁이는 ‘어둠’을 보여주는 것이다. <귀멸>도 그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만의 어둠을 안고 살아간다. 그 안에서는 도리어 작은 빛이 인간의 마음에 용기와 경외,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심어주기도 한다. 이야기의 깊이가 믿음의 깊이로 대체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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