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세계를 산책하다: 『쿄로쿄로』 감상기

by 수차미
900%EF%BC%BF20250702%EF%BC%BF081904.jpg?type=w966

『쿄로쿄로』 창간호를 읽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느낌의 잡지였다. 대개 글을 위주로 한 잡지는 지면 편집보다는 글 자체를 더 잘 싣는 일에 중점을 두기에 내지 편집도 단조로워지곤 한다. 하지만 『쿄로쿄로』는 내지의 다양한 면을 글 사이의 동선을 잇는 일에 할애했다. 그 덕분에 하나의 세계를 탐험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잡지란 건 원래 이랬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단순히 글을 모아두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아쉬운 점이 항상 있다. 어딜 가든 글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에서 ‘책’이라는 건 단순한 모음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령 한 평론가가 이곳저곳에 기고했던 글을 한데 모아 평론집을 냈다고 가정하자. 문맥을 하나로 맞추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별수 없이 특정한 기준을 세워 글들을 정렬하게 된다.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가라던가, 국가라던가, 사조라던가, 아니면 글을 쓴 사람이 연재했던 플랫폼별로 줄을 세우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안타깝지만 이 경우는 평론가 개인의 문체나 감정 등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면 책을 구매할 동인은 약하다. 글을 읽을 것이라면 밖에서도 읽을 수 있으니까 굳이 책을 사서 볼 이유가 없다. 이 글을 연달아서 읽음으로써 ‘평론가’가 세운 세계를 느껴보고 싶다는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쿄로쿄로』는 그 점에서 그동안 잊고 지내던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했다.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이야기를 끌어가는 동인은 ‘더 놀고 싶다’거나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이다. 미련이라고도 볼 수 있겠고 어리광이라도 볼 수 있겠지만 사실 무언가를 끝내는 일이 꼭 성숙함의 표식이 되는 것만도 아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거나 바라보는 것 또한 어른의 모습일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아는 순간은,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게 오직 자신뿐이라는 걸 알아채는 순간이기도 하니 말이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만 변화할 수 있다는 게 바로 어른의 모습이다. 그 점에서 『쿄로쿄로』는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들을 즐겁게 해줬다. 만화나 문학과 같은 형식의 장점은 스스로의 힘으로 ‘다음’을 선택함에 있다. 페이지를 넘기는 일은 대개 큰 생각이 없이 이루어지지만 어느 순간 즐거움과 슬픔, 공포와 연민 같은 감정이 들기 시작한다. 어른은 아무런 생각 없이 걸을 수 없다. 한 발자국 발을 디딜 때마다 수면이 크게 요동친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정해진 길을 벗어나기 일쑤다. 그렇다면 이런 삶을 두고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볼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페이지를 넘겨라.


같은 말을 반복한 게 아니다. 에이드리언 마틴은 「페이지를 넘겨라: 미장센에서 디스포지티프로」라는 글에서 “영화는 세 개 장치들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한다”고 말한다.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각종 담론이나 논의들이 실종되는 이 무대는 영화가 담론을 생산하는 기계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존재일 뿐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누군가에 의해 정의되는 게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었다. 마치 독립영화의 존재가 사회에서 고립된 무언가가 아니라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또 그렇게 앞으로 달려나가는 일을 뜻하듯이 『쿄로쿄로』의 발걸음은 오롯이 자기에 집중돼있다. 말하자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은 대개 무언가를 의도하기보다 그저 걷는 감정 자체가 더 좋기에 벌어진다는 소리다. 가령 놀이동산에는 많고 많은 어트랙션이 있지만 이들 사이를 채워주는 게 꼭 필요하다. 이 세계가 정말로 이곳에 실존하고 있으며 이들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야 이곳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계에 사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면서도 바로 그렇기에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쿄로쿄로』라는 의성어도 그런 기분 좋은 산책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 단계로 갈아타기에 앞서 빠르게 달아나기보다 삶의 기분 좋은 순간을 두리번거리는 것 말이다.


개인적으로도 좋은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 기쁘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어딘가를 향하는 건 그리 크게 체감되지 않지만 어딘가에 발걸음을 옮기는 건 매 순간을 의식하게 하는데, 『쿄로쿄로』에 보낼 원고를 적는 일은 주변을 보기보다 자신에만 충실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를테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루미를 떠올려보자. 루미는 악귀와 헌터의 혼혈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출신을 숨기려 하다가 끝내 동료들에게 신뢰를 잃게 된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일 테다. 타고난 출신으로 자기를 규정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야말로 도리어 하나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오늘날 애니메이션에 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부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화로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도 영화나 미술 같은 보다 ‘있어 보이는’ 쪽으로 넘어가곤 한다. 반대의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나 경력에서 그런 것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린다면 독자로서는 도리어 뭐지 싶은 부분이 있게 된다. 물론 애니메이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글을 쓸 수 있는 지면이 생겼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 사실도 의미 있게 적어두어야 할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기사의 행간, 비평의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