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정치부 기자를 체험하면서 느낀 건 정치가 비평과 비슷한 면이 많다는 점이다. 우선 정치부 기자의 일이 기자들 사이에서도 유독 결이 다르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정치부 기자는 기자들 사이에서 ‘소설을 쓴다’는 말을 듣곤 한다. 이는 정치인들의 말이나 행동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아니어서인데, 흔히 ‘외교적 수사’라고 말하는 게 행위의 근간에 깔렸기 때문이다. 가령 강유정 국회의원은 문화예술계를 대표해 국회의원이 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정치인’의 화법이 익숙지 않다고 말한다. "말을 새로 배우는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정치인의 언어는 표면에 드러나는 것과 속에서 가리키는 게 서로 달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정치부 기자는 이를 해석해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사실로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주관이나 해석이 반영되기 마련이고 그래서 ‘소설’을 쓴다는 비판을 듣는다. 사실 자체로만 글을 꾸려가는 게 기사의 정석이니까 정치 기사를 쓰는 건 어쩌면 정석에서는 벗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부 기사에는 늘 행간이라는 게 있어서, 한 사건을 보도하는 일에도 자기만의 생각을 담을 수 있다. 이 점이 비평의 언어와 닮았다. 비평은 이 세상을 믿는 게 아니라 그 믿음이 세계를 이룬다고 믿는다. 상대방을 믿기 때문에 그만큼 행동의 범주가 넓어진다. 모두가 자신처럼 사고한다고 믿는 건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온전히 자기만의 그릇으로 창작된 글의 세계에서 이는 물론 가능하다.
흔히 잘 쓴 글은 한편으로도 완결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기승전결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작품이 꾸려놓은 이야기에 흠뻑 빠져드는 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한편의 글을 읽을 때 독자가 얼마나 이에 몰입하는지다. 일반적으로 기사는 위에서 아래로 읽어가면서 아래를 잘라내도 별문제가 없도록 쓰이고는 한다. 바쁜 와중에도 머리만 읽고 중요한 걸 다 알 수 있게 하는 건데, 어떤 의미에서는 정보가 최전선으로 나아간다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뒤에 있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무렴 읽지 않아도 좋은 것들. 어떤 때는 분량이 모자라 이런저런 잡설들을 후미에 엮기도 하는 만큼 이 말들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볼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이 말들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뒤에서 잘려 나가는 문장들은 그저 자리를 차지할 뿐인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흩뿌리는 작은 발자취들이다. 이 발걸음은 작은 파도 한번에도 쉽게 사라져 버리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정보의 바다로 돌려보낸다. 이 점에서 기사와 비평은 우리가 어딘가를 걷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순간으로 구성돼 있음을 말하는 것은 이들 양식이 동시대를 말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글의 세계는 작지만 한 걸음을 차분히 내딛고 있다. 이 안에서 우리는 길을 헤멜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시선을 보내는 나 자신에로 돌아오게 된다.
정치의 언어와 예술의 언어는 확실히 달라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정치를 잘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행동에 여러 방식이 있는 것처럼, 글을 쓰는 일에도 꽤 다양한 방식이 있다. 기사를 쓰는 일과 비평문을 쓰는 일이 그렇다. 중요한 건 이 둘이 표현양식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기사와 평문의 작법이 서로 다른 건 사실이지만, 결국 글을 쓰는 일이 한 세계를 꾸려가는 일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기사는 사실을 전하는 글이지만 반대로 그런 사실들이 세상을 모두 안전하게 떠받치지 못한다는 점을 간과하고는 한다. 씨줄과 날줄로 엮인 기사는 그런 천자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들에 관해 알지 못한다. 아무리 삼키려 해도 달아나는 목소리가 있듯 씌워지지 않은 천들에는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진실이 있다. 기사를 쓰는 일은 자신이 그 모든 것을 망으로 담을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이들이 작업에 동참해 조금이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사실들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의를 추구하거나 진상을 밝히는 건 그런 문제를 다 논한 후에 말해도 지나지 않다. 비평문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 하나가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다. 머릿속은 풀리지 않은 생각으로 가득하고, 어딘가 어두컴컴한 기슭이 기어 올라오는 것만 같다. 이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설사 그게 자신의 불완전함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다.
기자가 되기를 꿈꾸는 이들은 대개 자신이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기자도 결국 월급을 받고 글을 쓰는 사람일 뿐이다. 진실을 쫓는 과정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만 할 뿐 자신이 바라는 이상을 비쳐주지는 못한다. 세계는 완전하지 않아서 그런 일을 의식하다 보면 결국 크게 실망하게 되는 때가 온다. 기자를 꿈꾸는 사람들이 쉽게 현장을 떠나는 건 세계에 대한 믿음이 배신당했다고 여기면서, 반대로 그 세계의 크기가 연봉처럼 수치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계에 대해 쓰는 일도 드문드문 엉성하게 되고야 만다. 무언가를 꿈꾸기보다 들이닥치는 마음을 기우기에만 급급한 게 글을 적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밖을 비추기보다 안으로 숨는 일을 택한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자신이 아는 진실이 바라보이기를 희망하며 자기만의 공식을 세운다. 요컨대 글을 오밀조밀하게 잘 구성한다는 말은 그만큼 세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방정식은 우리가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아직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으로 구성된다. 어쩌면 우리가 글을 써야만 하는 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여기 이곳에 버티고 서 있는 자기 형체를 지켜내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기사를 쓰는 일이 가장 알아보기 쉬운 사실을 전선에 두는 건 그 때문이다. 오히려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야말로 겉으로 꺼내두어야만 한다고,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동인이라고.
우리가 점점 더 글을 잘 쓰게 될수록 세계는 더욱 굳세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던 바깥들에 다가서는 일도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자의 역할은 명운을 다한 게 아닐까? 잘 쓴 글이 완결성이 있다는 말은 반대로 바깥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사를 쓰는 일이 세상에 대해 알게 해준다는 말은 어쩌면 더는 통용되지 않는 말인 것만 같다. 가령 영화에 대해 쓰는 일이 영화에 대해 무언가를 더 잘 알게 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 대해 쓰는 건 자신이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에 관해 쓰는 것이므로 점점 더 폐쇄적이기만 하는 것뿐일 수 있다. 물론 그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이렇게 자신을 구성하는 것을 점점 가르다 보면 우리는 자신을 올려다볼 수 있게 된다. 밤하늘에 쏘아 올린 작은 폭죽 하나가 새벽녘의 울음에 금세 파묻히더라도 명멸하는 불빛들이 빛을 다할 때 이 새벽에는 동이 틀 것이다. 자신이 쓴 글을 아무도 읽지 않을 수 있다. 글 하나가 뭔가 큰 파급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발판 하나가 여기에 생겼다. 그 길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지만 자신이 믿지 않으면 금세 꺼져버릴 것만 같은 그런 불씨다. 작은 믿음들에 보답하는 일은 무엇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보답하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은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아주지 않아도 믿음을 관철하는 일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글을 쓰면서 돈을 벌거나 문장을 조립하는 일에서 오는 즐거움은 또 다른 문제고 말이다.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어서 자신을 영화평론가로 지칭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영화평론가가 아니고 싶어서 영화 좋아하는 사람쯤으로 소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뜻에서 기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아이디어가 좋아서 글 하나만으로도 세상에 물결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한편의 글 안에서 생각이 맴돌다가 그런 여운을 세계의 여진으로 확장하는 사람도 있다. 둘 중 하나라도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전에 글을 쓴다는 게 어떤 일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사실 글쓰기는 기술적인 일에 가깝다. 기사를 쓰는 일이나 비평문을 쓰는 일이나 잘 보면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표현들이 어떤 지점에서 반복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생각을 잘 조합하는 것만으로 ‘생각이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 중요한 건 자신이 보고 들은 것 중에서 무엇이 우리를 다가서게 하는지, 그리고 그곳에 자신이 한 가지 가능성으로서 우뚝 서 있을 수 있는지다. 항상 글을 잘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글을 잘 쓴다기보다는 어떠한 형태의 도착점에서 계속 이탈하고 싶다. 생각한 대로 믿으면 그 믿음이 바로 우리를 사로잡으니까 우리는 스스로가 헤쳐나가야 할 어둠을 스스로 설계하는 것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의 거대한 소용돌이 안에 살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밤의 어둠 속을 걷고 싶다는 마음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어둠 속을, 텅-빈 곳을 가로질러야만 한다. 단지 그렇게만 알고 있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