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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모토 타츠키 단편집 28~29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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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집 <후지모토 타츠키 17-26>가 영상화됐다. 기존에 <룩백>이 영화로 제작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들 예상했겠지만, 그래도 놀랄 만한 일임은 확실하다. 그도 그럴 게 이들 단편집은 해당 작품을 그렸을 때의 나이를 따라 명칭 됐기 때문이다. 타츠키가 92년생임을 감안하면 <룩백>의 넘버링은 28번이며, 이걸 영상화한다는 건 이전 작품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팬들의 주목을 받는 건 29번 넘버링인 <안녕, 에리>다. <룩백>과 비슷한 분량으로 그려진 이 단편은 아마도 단일 판본으로 영상화돼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으로 팬들은 추정하고 있다. 특히 <안녕>은 영화와 찍는 이의 관계를 다루기에 더욱 주목받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영화로 만든 소년과 그와 동행하는 흡혈귀 소녀의 우정을 그린 이 작품에서 카메라는 이들 세계의 내면을 표면까지 끌어올리는 일에 집중한다. 앞뒤가 맞지 않거나 초현실적으로 여겨지는 많은 대목들은 카메라가 이를 표면까지 올린 덕분에 하나의 장면으로서 지목된다.


굳이 따진다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카메라의 유물론적 성질을 돌아보게 된다. 가령 인간의 표정은 일상에서는 쉽게 휘발되어 사라지는데 이는 감정이라는 비언어적인 표현을 지시하는데 전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카메라 안에서 표정은 어떠한 순간을 지시하는 도구로서 무언가를 표현하기 전에 그 자신이 표현의 대상이 된다. 즉 기표와 기의가 서로 일치한다는 뜻에서의 표면이 되는 셈이다. <안녕>은 이렇게 카메라가 대상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감정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가꾼다. 빗대자면 감정의 ‘얼굴’을 만들어줌으로써 우리가 이를 마주본다는 인상을 준다. 가령 작중의 말처럼, 찍는 사람만이 세계를 가질 수 있다면 세계도 찍는 이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경우, 영화는 극장을 나서는 우리에게 선물을 안기지만 반대의 몫도 생각해두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영화에 무엇을 돌려줄 수 있을까. 인간관계란 게 등가교환이 아니니까, 이 사이에는 얼마든지 배신이 이루어질 수 있다.


내가 상대방을 좋아했던 만큼이나 상대방도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렇다면 영화도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가 자뭇 궁금해진다. 하지만 이따금 영화는 보란 듯이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는데 타츠키의 작품은 이러한 감정을 보여주는 일에 능숙하다. 이를테면 <안녕>은 작중에 등장하는 영화나 만화 모두 폭발로 끝나는데 이는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작품을 보던 독자는 자신의 예상에 빗나간 모습을 보며 일종의 배반감을 느낀다. 혹자는 괴랄한 유머센스라고도 보지만 중요한 건 이러한 배반 이후다. 배반을 당한 후에 모든 게 끝나버리지 않는다. 그냥 길이 엇갈렸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채로 줄곧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뿐이다. 마음을 안고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훗날 같은 길에 돌아온다 한들 이전에 걸었던 길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때 등장인물은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는 중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상대방은 “그렇다”고 답한다. 과거에 와본 적이 있는 길이어서 도리어 다시 방문할 수 있음이 바로 배반의 멜랑꼴리다.


사람들이 타츠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건 특유의 개그센스나 그림체만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배반의 감정에 익숙해서다. 영화가 자신의 예상을 넘어설 때 우리는 일방적인 투사 관계에 있던 작품이 도리어 자신을 배반했다고 여긴다. 분명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이렇게 되었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은 일에 분노한다. 아마도 이는 우리 현실이 생각하는대로만 행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은 우리의 삶과 상호작용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앞서 간다. 이 안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나 관망은 그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세워진다. 이에 따라 우리는 순간을 보여주는 영화를 보러 떠나지만, 정작 영화가 그 자신의 표정을 지어 보일 때는 무언가 기이하게 생각한다. <안녕>의 결말이 판타지로 끝나는 건 그런 점에서 의미 있다. 이 작품은 무언가 판타지가 부족하지 않겠냐는 말과 함께 거대한 폭발로 끝맺음한다. 영화가 환상을 보여주는 매체라면 이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 다만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배반하고 영화로 하여금 살아가기를 명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체인소맨>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레제편’이 극장판으로 제작됐다. 영화는 ‘폭탄의 악마’인 레제가 덴지를 찾아와 암살하려는 내용을 다룬다. 첩보의 수단 중 하나인 미인계를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덴지는 고뇌한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야 만 것이다. 여러 판타지스러운 상황을 겪으며 덴지는 자신이 꿈 속을 살아가는 게 아닌지를 자문하는데, 함께 놀러 간 축제의 불꽃놀이에서 이 환상은 깨지고야 만다. 서로 입을 맞추던 중에 레제가 덴지의 혀를 절단해버리고야 만다. 이제 덴지는 말할 수 없고, 덩달아 마음을 잃을 처지에 놓이기까지 한다. 마치 환상이 깨어지는 듯한 이 장면은 덴지의 마음이 현실에 쫓겨남과 함께 타츠키의 ‘배반’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선 이 장면은 덴지가 현실을 택하기로 마음을 먹는 중대한 대목이다. 만약 여기서 꿈밖에 쫓겨나지 않았다면 덴지는 마키마를 상대하지 못했을 테다. 왜냐하면 마키마는 지배의 악마로서, 영화를 항상 자신의 시선 아래 두었기 때문이다.


일본총리와 계약을 한 마키마는 일본 전역의 자국민을 생명 삼는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에게 영화는 특정한 부류의 계약으로 매개됐으며 이에 따라 등가교환이라는 가치가 성립한다. 그녀에게 영화는 예측할 수 있고 또 통제할 수 있는 부류에 속한다. 통제할 수 있으니 판타지가 아니며 배반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마키마는 체인소의 악마에게 설사 먹힌다 해도 상관없다고 여긴다. 한편으로 덴지는 마키마를 배반하는 게 옳은지를 끝없이 고뇌하는데 세상에 의미 없는 영화가 없다고 여기는 덴지에게 ‘배반’은 틀린 가치가 아니다. 마키마와의 영화관 데이트에서 덴지는 재미없는 영화가 없으면 재미있는 영화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분명 영화가 자신의 삶을 바꾸는 순간이란 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모든 순간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영화가 판타지인 이유는 폭발에서 모든 것을 저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깨어난 세계로 데려가고자 함이다. 영화는 우리가 지배해야 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단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점에서 배신자일 뿐이다.


레제와의 전투에서 덴지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모두 체인소의 심장을 노린다”고 말하며 자신을 ‘덴지’로서 보아달라고 소리친다. 덴지는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이 배반당하는 경험을 한다. 쉽게 마음을 주기 때문에 그만큼 쉽게 배반을 당한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는 영화가 특정한 지배의 산물이 될 수 없다고 보는 관점과도 연결된다. 타츠키가 바라보는 영화란 단순한 오마주로 소비되기보다 자신의 삶 어딘가에 정박하지 않는 무언가다. 삶의 특정 순간을 떠올리기보다는 전체 어딘가에 녹아들어 위치를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는 그만큼 시간이 오래 흘러서일 수도 있고 혹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마음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일에서 배반은 판타지를 성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재미없는 영화가 재미있는 영화가 있어 이름을 얻듯 환상이 실존하는 건 항상 현실이 그에 어긋나서다. 물론 비스듬히 바라보면 이를 볼 수도 있겠지만 그와 같은 ‘간극’은 우리의 시선과 대상이 현실에서 일치하지 않는다는 ‘착오’를 일으키기만 한다.


이 배반의 정점에 서 있는 건 28번 단편선인 <룩백>이다. <룩백>은 영화가 허락한 순간을 온전히 배반하는 플롯으로 구성됐다. 주인공이 소꿉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자 영화는 만약의 전개를 보여주며 잠깐의 도피를 허락한다. 그러나 이 환상은 앞을 향한 시선이 사실은 누군가의 뒤를 쫓는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둘이 서로 다른 구성인 듯 보이기 쉽지만 사실 그것들 모두가 같은 현실을 공유한다. 현실을 보는 영화는 반대로 현실에 의해 보이기도 한다. 타츠키가 주인공과 소꿉친구의 관계에서 발굴한 건 영화가 어떻게 과거의 한순간을 재현하느냐가 아니라 ‘재미없는 것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일은 불가하다는 점이다. 삶에는 고통이나 슬픔, 분노와 모멸감 같은 여러 지지부진한 감정이 있지만 이들이 없으면 표정을 짓는 건 불가하다. 우리가 속마음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지 않듯 영화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생각을 밀어 올린 얼굴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단지 착오일 뿐이라고, 배반은 그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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