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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코미디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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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A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암암리에 인기를 끄는 모습을 보면 무언가 생각이 많아진다. 한 나라의 유머와 감정, 문화코드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비슷한 이야기는 많다. 자막으로 보는 영화는 그 내용을 제대로 감상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나, 네이티브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들에 관한 내용 등. 이에 따라 대개는 자신이 아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치환해 받아들여지는 때가 많은데, 개중에서도 ‘코미디’는 그게 통하지 않는 일이 더 많다. <원 배틀>의 경우 미국의 백인우월주의나 다른 무언가를 레퍼런스 삼지만 생각보다 이들에 대한 관객의 이해는 심오하지 않고, 영화가 끌고 가는 박력 등에 더 영향을 받는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자유 대 자유에 대한 대결보다 국가와 민중 간의 갈등이 주요했던 한국에서 ‘혁명’은 서로 다른 결로 읽힐 확률이 더 크다. 혹은 한 이념을 몸에 짊어진 캐릭터 간의 대결로도 볼 수 있을 테다. 슈퍼맨 대 배트맨 같은 미국식 정의의 산물이라고나 할까. 비련한 주인공이 무자비한 악당에 대항하는 일은 할리우드식 액션영화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꽤 익숙한 플롯이다. 여기서 개인은 꼭 무언가를 대변하는 입장일 필요가 없고 다만 악당과 반대되기만 하면 된다. 서로 다른 입장 사이에서 상충하는 가치가 대두하면, 그게 우리가 보는 이 무대가 되니 말이다. 코미디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에 호소하지만 반대로 무엇이 기본적인 가치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옳고 그름, 정상과 비정상, 여장을 하고 베이스를 연주하는 사람이 유머로 소비된다면 우리가 이를 정상적이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남성이 여성의 복장을 하지 않는다는 이례성에 초점이 있을 뿐, 연주자 개인에 대한 이해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생각해보면 코미디가 무엇인지는 모호한 감이 있다. 학술적인 정의를 손보자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실소를 짓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한 영화의 진지한 장면에서 매번 웃으면서 극장 안을 시끄럽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무언가 명백하게 ‘웃으라’고 신호를 주는 게 아니라면 어느 곳에서 웃어야 할지 난감한 때가 있다. 영화를 보면서 웃지 않으면 무언가 잘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아가서는 의도한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가 슬프거나 기쁜 감정으로 총괄 이해되는 반면 ‘웃음’은 특정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이 점은 웃음이 줄곧 유지되기 힘들다는 점과 함께 그것이 일상의 한 틈새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는 곧 우리의 일상이 유머와 행복으로만 가득할 수 없다는 점을 뜻한다. 유머와 행복이 일시적인 가치라면 나머지 모두를 채운 일상이 영화의 기본적인 토대에 자리한다. 이 토대는 그게 익숙하게 여겨지든 아니든 간에 항상 다른 현실을 위해 자기를 전복할 힘을 갖는다. 지반이 견고한 만큼 반대로 혁명이 일어날 확률도 높다. 바꾸어 말해 영화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여준다면 그만큼이나 그게 현실에 존재하는 무언가로 변환될 확률도 있다. 행복은 영화가 품기에는 너무 밀도가 높은 것만 같다. 그래서 이들 영화는 행복을 뱉어내려고 줄곧 슬픔의 순간을 기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코미디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일상의 소중한 순간이 코미디라면 우리가 이를 발견하는 건 어디까지나 뒤를 돌아보는 때에 불과할 것이다. 이 경우 코미디는 그게 언제 어느 곳에서 만났는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는 거짓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코미디 장르의 본류는 무엇일까? 가장 기본적인 곳으로 올라가면 아마도 배반일 것 같다. 사전적으로 볼 때 배반은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수 없을 때’를 가리킨다. 한곳에 공존할 수 없는데 그게 한곳에 모이니까 누가 보아도 ‘허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영화’라서 존재할 수 있는 풍경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코미디’라는 것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풍경이라면, 코미디란 ‘순간’이라는 말과 비슷한 뜻이 아닐까. 카메라의 본질은 시간을 나눔으로써 A에서 B로 교차하는 순간을 차례로 보여주는 것에 있다. 이에 따라 이행의 과정은 마치 진화계통을 연구하는 것처럼 이전과 이후의 연결고리를 찾는 게 된다. 아무리 프레임을 세밀하게 쪼갠다 한들 결국 ‘완벽한’ 형태의 ‘영상’을 끌어낼 수는 없다. 이로 인해 프레임 사이에는 항상 우리가 놓친 ‘순간’이 존재하며, 이 순간이 바로 코미디가 거주하는 장소이다. 논의를 조금 이어나가면 영화사의 초창기에 존재했던 ‘시작의 장르’가 바로 코미디였다는 걸 떠올릴 수 있다. 소위 슬랩스틱이라 부르는 이 몸개그는 잘라내고 붙여 넣는 간단한 일에서 출발해 인위로 조작된 환경에 인간이 침투하는 스튜디오 개그로 양분할됐다. 뤼미에르의 초기 영화를 살펴보면 물을 뿌리던 정원사가 호스를 놓쳐 이리저리 물이 튀는 장면이나, 자동차 등과 충돌하는 순간에 자동차가 느닷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장면이 예시다. 이들 영화는 일상의 한 부분이 잘라내어졌을 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를 관객에게 제시했다.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이들 영화가 충분히 ‘재밌다’고 여겼으며 이에 ‘코미디’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쪽으로 반영됐다. 코미디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봐도 웃겨야 진정으로 ‘코미디’인 셈이다.


코미디는 타인의 시선이 없으면 설립하지 않는다. 영화의 입장을 빌려 말한다면 코미디는 자신을 견줄 현실이 없으면 웃기지 않는다. 한 유머가 유머로서 받아들여지려면 그게 원래 어떤 맥락으로 소비되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코미디는 생각보다 자기객관화가 많이 필요한 장르다. 단순히 한 세계를 받아서 돌려준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나아가서는 변화의 순간을 관측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코미디는 변화를 관찰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역동적이고 또 진취적인 장르다. ‘배반’을 위해 마련된 이 무대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이 끊기에 적한 곳일지를 생각해보고는 한다.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할수록 감정의 폭이 극대화한다. 가령 봉준호의 <기생충>은 한 가족이 모두 상대방의 집에 들어와 생활하는 장면에서 이야기의 다음 장을 진행시킨다.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가족이 사실은 세 가족이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영화의 순간에도 균열이 간다. 배반의 이중주가 삼중주로 변화하면서 상상할 수 있는 미래에도 금이 간다. 감정의 파고에 새로운 패턴이 등장하면,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파도가 아니라 쓰나미와 같은 재난의 징조라는 걸 알게 된다. 즉 코미디에는 어느 정도 낙차가 존재하며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영화의 성향이 갈리게 된다. 다만 코미디 장르의 핵심은 영화가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야 한다는 점이다. <기생충>은 쌓아올린 것을 무너지는 일이 있는 한편, 마지막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구할 것을 각오하는 일로 끝이 난다. 어떤 형태로든 회복을 암시하는 지표가 없으면 코미디는 장르로서 성립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코미디는 결국 “영웅이 집으로 돌아오는 전통적인 서사”와도 유사한 점이 있다.


누군가는 스크루볼 코미디를 떠올릴 것 같다. 우여곡절을 겪어도 다시 재결합에 성공하는 이 과정은 어떤 면에서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다만 코미디의 경우 이 과정에서 배반의 결과가 서로 달라붙지 않기에 완성된 판본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점이 블랙코미디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대개 유머는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는 의도한 것과 다른 맥락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는 유머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여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 유머는 이에 속한 균열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사회고발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감정이 일종의 고점에 해당한다는 걸 고려하면, 다가올 저점에서 유발될 낙차가 우려되는 면은 분명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게 공존하는 순간은 말 그대로 현실을 초과한 무언가여서 대개는 일상의 균열이 시작되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알을 깨고 나오는 일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는 다양한 형태의 충격경험을 필요로 한다. 블랙코미디의 역할은 그 세계를 깨부수는 게 아니라 한 개인이 세계에 태어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를 고발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사회에 의해 특정되는 개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현실을 배반하는 형태를 띤다. 인물을 통해 시대상을 배경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시대가 인물을 자꾸 엇나가게 하는 식으로 유머를 선보인다. 이때 우리는 인물이 무언가 잘못됐다거나 잘못한 것처럼 느끼지만 이런 판단은 어디까지나 사후판단에 불과해서 결말을 향해가는 과정에서는 알아채기 힘들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가 코미디를 보며 그게 ‘웃기다’고 느낀다면 이미 우리 현실이 되돌리기도 힘들 만큼 추락을 겪는 중이라는 말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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