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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태양의 불꽃

<에스퍼의 빛>(2024)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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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동시에 무언가를 하는 일이 요즘에는 잘 없다. 무언가 인기를 끄는 것처럼 보여도,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나면 자신이 얼마나 좁은 곳에 갇혀있었는지만을 알게 될 뿐이다. 취향은 점점 소수화되고 있고 반대로 ‘소수’가 세계의 ‘전부’가 되는 일도 늘어났다. 가령 어린아이에게 세상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전부여서, 아이는 ‘엄마’나 ‘아빠’ 같은 말로 이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된다. 아이에게 세상은 부모를 통해서만 파악되며 이때 아이의 세계는 모두 부모의 것을 물려받는다. 이때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바깥 세계를 갈구하기 시작한다. 부모가 물려준 세상을 벗어나 자기만의 것을 차츰 알아간다. 이 관점에서 바라본 사춘기는 반항이 아니라 도리어 영토화의 시기에 가깝다. 영토화란 자기만의 영역을 전개하는 것, 어디까지가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인지를 배우는 과정이다. 가령 어린아이는 처음으로 발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하늘을 거머쥐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 시도는 이내 약한 발로 인해 주저앉게 되는데, 이때 온몸의 근육을 제어하려는 마음이 하나의 영토를 구축하게 된다. 어디까지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몸인지를 알게 되면서 일종의 ‘경계’를 수립하게 된다.


경계를 말할 때 먼저 떠오르는 건 모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개념인 ‘산데비스탄’이다. 신경을 가속해 주변 시야를 상대적으로 ‘멈춤’에 가깝게 보여주는 이 연출은 몸의 경계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인상 깊다. 몸의 경계를 분해하는 대신, 잔상을 남기며 한 세계를 활보하는 이 연출에서 우리는 자기를 유지하면서 한 세계에 녹아들려는 시도를 본다. 세계의 끝까지 달려가 보는 일은 끝내 인간의 몸을 뒤틀어놓는다. 동시에 주인공은 정신을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리고야 만다. 이처럼 몸의 형태는 대개 마음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경계’는 그런 것들을 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만약 경계가 없다면 우리는 몸과 마음에 괴리감을 느낄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경계란 무언가를 나누거나 가르는 일 말고도 서로를 붙잡아두는 지지대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경계란 일종의 문과 같다. 우리는 앞으로의 삶이 막막할 때 다른 어딘가로 통할 문을 찾아 헤매곤 한다. 비록 그게 정말로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게 아니더라도 ‘문’이 주는 상징성이 그 자체로 있다. 이른바 산데비스탄은 경계를 허물지 않고 몸을 이어나간다는 점에서 ‘활보’의 자유로움이 있다.


<에스퍼의 빛>은 서로 다른 문들이 모여 하나의 공간에 모이는 모습을 다룬다. 이 안에서는 각자가 다른 세계에서 왔지만 왠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기에 이 모습은 다소 기념할 만한 현상이 된다. 온라인에서의 롤플레잉은 서버 안에 캐릭터를 저장해 두는 형태로 즉 ‘투영’을 전제로 이루어지지만, 현실에서의 롤플레잉은 집단의식 안에 캐릭터를 봉헌하는 방식 즉 ‘투신’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접속의 장소와 대상이 일치하기에 이 안에서는 경계를 형성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로 제시된다. 하지만 이들은 쉽게 장소와 대상을 분리해 내지 못한다. 이로 인해 ‘나’는 세계를 경계하면서도 몸을 이어갈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활보’의 자유가 등장한다. 세계에 어울리지 못한 채로 미끄러지는 것은 결코 의미화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몸을 해체하지 않고서도 한 세계에 녹아드는 일은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는 정확하게도 몸의 경계를 재설정하는 청소년 시기를 상정하고 있으며 이 세계에 열병이 찾아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데리다는 1995년 『아카이브 열병』을 출간하면서 아카이브의 욕망을 ‘자기파괴’와 ‘자기보존’으로 나눈다. 죽음충동을 두고서 상반된 두 에너지의 호응으로 서술하는 그에게 ‘아카이브’는 일종의 반전술식을 내포한다. 캐릭터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일은 현실의 ‘나’를 분리해 내는 작업이 아니라 도리어 되고 싶은 ‘나’를 전방에 투사하는 작업이다. 이른바 문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허공에 문을 만드는 과정에 가깝다. 허공에 경계를 그리고 나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통로로서 기능하기를 바라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이상으로 구현된 문은 꼭 자신의 몸에 알맞지는 않겠지만, 반대로 허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기에 그런 문에 자신을 맞춰보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바꾸어 말해 문은 단순히 한 세계를 나누는 경계로만 구현되는 게 아니라 파괴와 보존이라는 두 상태를 중첩시키는 역할을 한다. 롤플레잉이란 ‘열림’과 ‘닫힘’을 경계 삼아 구현되는 한편의 드라이브와도 같은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에스퍼의 빛>은 추상화를 거칠 때 다른 영화들과도 쉽게 어울릴 수 있는 것 같다. 가령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연극 무대감독으로, 작중에서 진행하는 건 서로 다른 언어를 지닌 이들이 합동으로 공연하는 컨셉의 무대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지만, 본래 원전을 토대로 연기를 이어가기에 극이 해체될 일은 없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줄곧 이어지는데 여기서 핵심은 ‘언어’가 서로 상충하지만 반대로 ‘배역’이 이를 지탱하는 형태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배역’이 자아를 상쇄한다는 점에서 ‘파괴’의 역할을 수행하고 언어가 자아를 구성하는 ‘보존’을 수행하겠지만, 이 둘이 서로 다른 곳에 있을 때 ‘배우’는 몸을 연기해서,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몸의 경계가 해체되는 상황에서 무엇이 ‘제자리’라고 할 법한 것인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몸을 연기할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상상하는 그 몸이 본래 제안된 극작 초안에 가두어져 있기에 이들의 몸은 서로 비슷한 형태를 꾸리게 된다. 온라인 롤플레잉이란 이것과 같다. 이것은 주어진 역할을 규칙을 따라 수행하는 게 아니라 혼돈에 동기화된 몸을 부수어 지식의 씨앗을 끄집어내는 일과도 같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기 위해 자기 몸의 경계를 부수듯이 무언가를 연기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타오르는 빛과 열을 동반하는 것이다.


광장에 나와 축구팀을 응원하던 2002년을 그리워하는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곳에 있다는 건 무언가 군집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때 우리의 몸은 군집의 크기에 동화돼 일시적으로 ‘나’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비유하자면 건담에 탑승한 것과도 유사하다. 군집에 ‘탑승’한 개인은 군집이 받는 충격이나 손상을 동일하게 느끼지만, 끝내 탑승물이라는 차이가 있어서 주체는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경계를 지닌 몸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장점을 가져다준다. 현실에서 허물을 벗는 일은 많게는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면서 작게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지만, 관계와 장소가 한데 엮인 군집 안에서 ‘탈피’는 우리가 해당 언어모델에 탑승하기 위한 전후 과정이다. 열병의 언어로 말하고 사고한다는 것, 이 안에서 개체는 서로에 어울리기 위해 어느 정도 경계를 해체해야 하고 반대로 집단의 의지에 동조해야 한다. 즉 자아를 유지하면서 이 세계에 투신해 밈이 되어야 한다는 건데, 이 과정은 ‘광장’이라는 지리학적 모델이 없을 때 실행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광장에 군집이 모일 때 이 공간은 공간에 모인 존재를 민중으로 승격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역할을 수행할 때, 그곳에 민중이 드러난다.


유비쿼터스 환경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한 곳에 모여 무언가를 하는 일을 보는 건 힘들어졌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를 만날 광장이거나, 혹은 자기를 특정한 역할로 이끄는 규칙이다. 그리고 이 규칙은 단순히 무언가를 제약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열림’과 ‘닫힘’이라는 양쪽으로 이해돼야 한다. 법은 무언가를 지키는 것만큼이나 외부를 파괴하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바로 이 경계가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에 놓여 있다면 여기서는 지켜야 할 것과 파괴해야 할 게 무엇인지를 딱 잘라 말하기도 힘들다. 마찬가지로 온라인을 유영하는 우리가 기억의 밈으로서 이곳에 남는다면, 이곳의 ‘에스퍼’란 인간의 형상을 감지해 세계에 드러내는 부류의 능력자가 아닐까. 조르주-디디 위베르만은 가려진 형상과 희미해진 경계에서 민중들의 형상이 위협받는다고 비판했다. 디지털 세계에서도 인간의 형상은 가려지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도 흐려진다. 이와 같은 이중구속은 숱한 단역들을 양산하며 이 세계의 가장자리로 그들을 밀어내지만, 도리어 이 ‘착오’는 주변부의 것들이 서로를 말하고 연대할 때 일련의 파멸을 양산하는 기관이 된다. 이는 자기만의 역할을 갖고 진리의 문을 추구해 가는 과정에 참여하는 일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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