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2025)
이상일은 <국보>를 두고 진행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말한 바 있다. “예술가의 대립을 소재로 하는 서사는 대개 상호 간의 질투나 배신을 감정의 원동력으로 삼지 않나. 이 소설만큼은 예술가의 혈통을 주지한다는 점에 마음이 기울었다.” 일반적으로는 비슷한 재능의 두 사람을 다루게 되면 전자가 주를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가령 닌자 마을을 다룬 만화 ‘나루토’를 떠올려보자. 나루토와 사스케 두 사람은 싸우고 화해하며 서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혈통의 비밀을 짊어지기는 해도, 단기간에 인물의 성장을 보여주려면 어쩔 수 없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편으로는 이들 작품이 말하는 ‘혈통’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과도 같아서 무언가 속상하거나 궁핍하게도 느껴진다. 록리 같은 친구가 옆에 있다면 더욱 그렇다. 여튼 ‘나루토’가 점점 혈통주의로 변해가면서 독자들에 실망을 안겼다면 처음부터 이를 중심으로 한 <국보>는 이야기가 다르다. 영화가 시작하면 야쿠자의 아들이 가부키 극을 진행하는 모습이 나오고, 이후 문신을 새기기에 이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사실이 된다. 영화 내내 곳곳에서 배경을 문제 삼으므로 오히려 혈통이 성장에 방해가 된다. 오죽하면 키쿠오가 슌스케에게 “네 피를 갖고 싶다”고 할 정도다.
혈통에 대한 관심은 이상일 감독 개인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부류에서는 생각해볼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영화의 핵심 갈등은 키쿠오를 양자로 들인 슌스케 가문이 키쿠오를 후계자로 선발한 것이다. 전체 영화 3시간 중에서 키쿠오가 양자를 들이는 순간은 영화의 갈등이 극에 달하는 대목이다. 슌스케는 가문의 후광에도 실력이 뒤떨어진다는 점을 비관해 집을 나간다. 이 과정에서 슌스케가 키쿠오의 멱살을 잡는 구도는 시간이 지나 키쿠오가 슌스케에게 하는 멱살로 그대로 재현된다. 세간이 키쿠오를 뻐꾸기 취급하며 온갖 추문을 덧붙이자 그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리고야 만다. 그는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도 힘들었던 자리를 ‘적자’가 쉽게 획득하는 걸 보고서 업계의 현실을 깨닫는다. 전반적으로 평이한 전개지만 최근에 이야기를 마친 만화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그건 바로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다. <나히아>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이 없는 주인공이 기연을 만나 무공을 전수받고, 이를 통해 자신이 바라던 영웅상에 도달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의 스승은 숙적과의 대결을 마친 후 카메라를 향해 “다음은 너다”라며 말을 건넨다(카미노의 악몽). 원포올이 물리적인 면에서의 계승이라면, 이 지목은 정신적인 승계를 가리키는 셈이다.
원포올은 일종의 유사 혈통이다. 당장 원포올부터가 재능을 염두에 두고 전하는 게 아니라(무개성일 것은 조건일 뿐이다) 피계승인의 성향을 보고 물려주는 것이다. 원포올을 통해 몸에 선대가 깃드니 단순히 노력으로만 되는 뭔가도 아니다. 애초에 노력을 말하는 작품이 아니지만 그래도 신체를 운용하는 소프트웨어로서의 장치적인 면을 염두에 두게 된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주인공이 원포올의 잠재력을 백퍼센트 발휘하는 건 불가능했고 이는 곧 그가 재능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는 게 된다. 그러나 원포올은 혈통이 아니라 올포원을 멸한다는 밈을 토대로 했기에 여기서 신체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따라서 카미노의 악몽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전한 말은 특정인이 아니라 적합한 형태의 구조를 지닌 다수에게 절대적인 감염을 일으킨다. 스승의 실책은 이 발언이 공론장에서 발화돼 불특정 다수에게 서로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질 것으로 착각한 점에 있다. 한 영웅상을 수행하는 주체는 다양한 의견을 망라해 연기할 능력이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다. 그래서 “다음은 너다”라는 말은 작품 안에서도 다양한 이들에게 연기를 발동하는 동기가 되어주지만 대개 그 끝은 무대의 형식을 이탈해있어서 사람들을 이해시키지 못한다.
스승인 올마이트의 사상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연기하면서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생겨난다.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는 다르고, 반대로 자신을 정의하려는 시도에서 ‘사상’은 일종의 분장에 가깝다. 가부키 안에서만 온나가타가 정형화된 형식으로 인정받듯 공적으로 인정된 예능에 속하지 않으면 ‘가부키’는 인스타그램 릴스 같은 평면 수준으로 전락해버린다. 작중에서 잠시 무대를 떠난 키쿠오가 식당을 전전하며 가부키를 자체적으로 소환해내듯 ‘무대’가 없으면 그가 취한 연기는 아무런 것도 아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가부키가 무대라는 형식과 객석의 사람들과 함께 존속하는 ‘장치극’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게 한다. 적어도 예능인에게 무대는 몸을 드러내는 외관인 것만 아니라 자기를 이루는 공적인 형식이다. 즉 이 안에 자신이 담기기에 반대로 무대를 떠나서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처음에 키쿠오는 무대를 등진 채로 생계를 이어가 보려 하지만 오직 이들 구조 안에서만 ‘연기’가 의미 있다는 걸 깨닫는다. 특히 무대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노력으로 쟁취해낸 ‘전방’만을 보지만 무대 밖에서는 등 뒤의 문신을 보고 식겁하는 등, ‘후방’은 혈통과 연결된다. 금방이라도 등 뒤의 문신에 잡아먹힐 것만 같은 상황에서, 키쿠오는 다시금 무대 위로 도망친다.
키쿠오는 자신이 받은 이름의 무게에 부담을 느꼈던 게 아니다. 오히려 이름 이전,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 몸의 문제를 깨달았기에 반대로 그런 장치극의 밖으로 빠져 나오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부키의 오랜 역사에서 그는 도망치는 것에 실패하는데 이는 가부키가 없는 삶을 이미 상상할 수 없게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의 마지막에 국보가 된 그는 무언가 성취감을 느꼈다기보다 끝내 가부키의 오래된 역사에 잡아먹힌 자기에 한탄했을 공산이 크다. 이 영화에서는 단연 가부키 가문이라는 유전적인 혈통만이 아니라 가부키의 가치와 양식에 동조하는 밈적인 계승 또한 있다. 어쩌면 키쿠오는 이 무대를 탈출하는 것에 실패한 쪽이 아닐까. 근본적으로 제도와 체제를 바꿀 용기가 없는 이들은 끝내 한 시대의 구석으로 흡수되고야 만다. 그런 작은 마음이 하나 둘 모이면 언젠가 세상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아니다. 가부키의 예외적인 형태가 된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피의 방향으로 몸을 열어젖히고 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개복된 몸이 미래를 향해 가능성을 전하는 형태가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에서 ‘국보’는 미래와 가능성을 회전하는 존재가 된다. 마치 <나히아>가 ‘다음은 너다’와 ‘너는 이미 부쉈어’라는 두 문장으로 다시 내부를 확장하듯 말이다.
<나히아>가 다루는 시기의 주요 갈등은 동일한 능력에도 누구는 차별받고, 영웅이 되거나 악당으로 전락하는 사회 구조다. 중후반의 전개에서 빌런 연합은 한 개인이 처한 상황을 사회가 보듬지 못했기 때문에 탄생했다. 개인의 능력이 선천적으로 유불리를 타고났다기보다 주변에서 이를 돌볼 사람이 부재했기에 ‘망쳐진다’고 보는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악당과 영웅의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악당에 대항해서 영웅을 키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악당이 되지 않도록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개인의 사연이 지금의 행동을 합리화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무대 위에서는 모두가 플레이어다. 설사 연기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해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물론 이런 생각에도 반대할 사람은 있겠지만 토가의 이야기를 보면 작가는 그편을 더 믿고 싶은 것 같다. 인간의 삶이 개인의 본성을 다루는 법을 연마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면, 사실상 온 세상이 무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의를 수행하는 무대 위에서는 모두가 연기자여서 ‘진짜’를 구분하는 일은 의미 없다. 착한 일을 하면 있는 그대로 착한 사람이고, 나쁜 일을 하면 지독한 악인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키쿠오의 모습은 일종의 인간승리처럼 느껴지면서, 동시에 새 시대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무대에서 개인의 몸은 여러 분장으로 탈각돼 크게는 식물의 움직임에도 가까워진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키쿠오가 슌스케를 대신해 ‘3대’를 계승받는 건 결국 가부키이기에 가능했다. 한국의 여성국극에서 여성이 남성을 연기하는 점이나, 가부키에서 남성이 여성을 연기하는 걸 떠올리면 결국 무대는 어떠한 예외지대로서 작동한다. 에도 막부는 가부키에 풍기가 망쳐지는 걸 바라지 않아 그런 명을 하달했지만, 반대로 가부키는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온전한 형태의 바깥을 만들어줬다. 현실이 도리어 완벽하지 않기에 늘 불안한 미래에 열린다면 반대로 닫힌 형식으로서의 무대는 무대에 오른 이들을 이입의 대상으로 삼게 한다. 마음이 단단하기에 타자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처럼,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연기한다는 건 옷을 입고 벗는 것처럼 마음을 두르는 것과 같다. 가부키는 아마도 관객이 그러한 탈각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무대가 되어줬을 것이다. 이 안에서 우리는 예능이 펼쳐지는 무대가 어떠한 능력들을 수행하는 장임을 떠올린다. 특히 무대는 다양한 이들의 능력을 취합해 감각으로 재분배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약자도 강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결국 키쿠오와 슌스케의 삶은 대립이나 갈등이 아니라 한 세계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