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토피아2>(2025)
<주토피아2>에 대한 첫 인상은 ‘KMDB에 올라올 것만 같은 영화’였다. 최근 <토이 스토리> 5편 제작 소식이 들려오는 등, 무언가 ‘끝’을 마주했던 것들이 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업체는 불분명한 새 IP를 창작하기보다 이미 검증된 과거 IP를 다시 가져와 살려낸다. 마치 <프랑켄슈타인>이나 <좀비랜드 사가> 같은 설정처럼 이미 한번 죽었던 것들이 진짜 사람인척을 하며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들 영화가 개봉한 시점은 몇 년만에 한국영화에 천만관객 작품이 사라지고 내년도 개봉 작품이 10편 이하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동시에 ‘서울영화센터’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경제논리를 ‘집행’하는 산증인이 되어버렸다. (한국)영화는 정말로 끝장나버린 걸까? 오래 전에 알아왔던 무언가를 시간이 지나 다시 스크린에서 보는 일이 이런 문제에 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래된 영화를 다시 개봉하거나 같은 소재를 한 이야기를 다른 감독이 새로 만드는 것, 올해 개봉한 <부고니와>와 <프랑켄슈타인>은 각각 원작을 토대로 제작한 서로 다른 판본이었다. 이들 작품은 이전 판본에서 수십년 정도가 지난 뒤에 개봉했는데 그 덕분에 과거와 현재의 시각차도 비교적 선명하게 담겨있었다. 예전의 일들을 적당히 각색해서 가져오는 일은 한 작품을 넘어서서 이 시대에 살아남으려는 생명체의 몸짓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기억 속에 있던 작품이 창작자를 숙주 삼아 낯선 미래로 돌아가려 한다. 그런데 만약 과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 시대에 가져오면 어떻게 될까? 적응을 하지 못한 생물은 차라리 숙주에 남는 쪽을 택하지 않을까.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극장에서만 살 수 있는 영화가 관객을 숙주 삼아 현실에 진출하려 한다. 이런 생각에서 극장에서 상영한 뒤에 특정 기간이 지나야만 OTT로 넘길 수 있게끔 법안을 제정하는 일이 추진중이다. OTT로 곧바로 영화를 넘기는 일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작품이 세간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적절한 수준의 기간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이 홀드백을 둘러싼 논의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유통의 측면으로 보이는 면이 더 크다. 가령 “영화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는 공급이 있어야 수요가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극장에서만 영화를 볼 수 있어야 극장에 사람이 들 것이라는 논리인데, 지금 상황은 영화를 볼 사람은 보고 안볼 사람은 애초에 보지를 않아서 이 지적이 무언가 정교하다고는 보기 힘들다. 애초에 관객층이 양분할된 느낌이랄까. 극장에 방문하는 일이 일종의 투자 상품으로 이해되는 상황에서 그냥저냥 극장에 놀러왔다가 아무런 작품이나 골라잡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다들 아이쇼핑을 통해 온라인에서 작품을 접한 후, 자신이 보려는 작품을 정해서 ‘예매’를 하고 오니까 극장의 의미는 사실상 대관업과 식품판매 두 가지로만 축소된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극장은 일시성과 특수성, 사건성이라는 점에서 백화점 팝업스토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냥 눈에 익던 게 극장에도 걸린다고 하면 그제서야 가는 보는 식이다. 이 감염의 형식은 이미 작품에 대해 알고 있던 관객이 사전지식과 배경으로 극장에 들어오는 형식이기에 오히려 쇼츠나 릴스, 커뮤니티 게시물 같은 바이럴 작업이 더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중진국 이상에서는 기생충에 감염되기도 힘들어서 정상적인 유통을 거쳤다면 관객이 그런 예술에 감염될 일이 없다. 오히려 유통 체계 바깥의 관객들이 토렌트나 딥웹 같은 비공식적인 경로에서 감염되어오고는 하는데, 이렇게 영화를 날것으로 소비하는 일은 용감하거나 전위적이기보다 야만적인 일처럼 보이는 면도 분명 있다. 다만 영화가 한 인간을 감염시키는 일이 그만큼이나 비위생적인 환경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반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위생’의 개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는 분명 있다. 어떤 영화는 되고 어떤 영화는 안 된다는 건 어쩌면 알레르기 차원을 넘어선 ‘차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산업적으로 보면, 주류 블록버스터와 독립영화의 유통 방식에 차이가 있으니까 독립영화쪽에는 도리어 홀드백을 적용하지 않는 게 나을 수 있다. 상영관 수가 적은 독립영화들에게는 VOD 플랫폼 자체가 하나의 상영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공정한 방식으로 정당한 수익이 창작자에 돌아가게 하는 일이다. 이런식의 차별은 한 인종이나 집단을 감옥에 격리하는 게 아니라 야만의 자연에서 구출해 법의 테두리 안으로 다시 데려오는 일이다. 문제는 이렇게 우리가 영화를 안에 구출하는 대신 소비하거나 섭취할 때 안전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검증된 영역 안에 있는 한 작품이 위생적이어야 한다고 보는 일에는 무리가 없지만, 한편으로는 상처를 말하는 방식으로서 영화가 상처를 드러내는 것 이외의 방법이 없는지는 고민해 볼거리가 많다. 상처는 감염되는 게 아니라 전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생각외의 방식으로 돌아와 우리의 앞통수를 때린다. 물론 후속작이나 후속하는 소식을 듣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대부분은 차라리 기억 속에 있을 때가 더 나은 때도 있다. 여기서 말해두고 싶은 건 예상치 못한 만남이 아니라, 기억 속에 있던 것을 다루는 방식이다. 모두가 이야기를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니까 자연스레 마지막 장면도 서로 달리 기억된다. 누군가는 <주토피아>의 1편에서 2편으로 가는 과정에 왜 닉의 입직이 자리하는지를 궁금해할 수 있고, 어쩌면 닉이 민간에서의 조력자로 남는 편이 더 나았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물음들을 안고 시작하는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주디와 닉 서로의 고백으로 문제를 맺음질한다. 두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밟고 서 있는 토양에 대해서도 토로한다. 닉은 주디와 함께하고 싶어 주디의 꿈인 경찰에 입직했고 주디는 자유분방한 닉이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 죽거나 떠나버릴까봐 전전긍긍한다. 이 사실은 영화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내용임에도 결말에 가서야 여태까지의 행동들을 설명하는 요인으로 제시된다. 마치 감정은 항상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영화에 할 수 있는 건 공격이 아니라 수비다. 바꾸어 말하면 영화는 가장 처음에 풀어두어야 할 말을 마지막까지 꽁꽁 숨겨둔다. 마치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를 다 아는 것처럼 마음을 속에 품은 채로 행동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일종의 회귀물이 아닐까? 미래의 어느 날, 과거가 선뜻 고개를 들고 나면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게 된다.
상처를 받은 이들은 이를 다시 마주하려고 같은 자리에 돌아온다. 이 안에서 시간은 흘러갔지만, 반대로 온몸에 퍼진 기억이 우리를 지금에 서게 한다. 사실 끝에서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일은 ‘닫힌 세계’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자유나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밖으로 꺼내어지지 않는 것은 타인을 설득시킬 수도 없으니 말이다. 닫힌 내부엔 다른 생각이 들어설 구석이 없고, 이는 ‘끝’을 마주하는 일에도 왜 균열이 일어나야만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세계는 서로 다른 기후가 한 자리에 공존하는 ‘주토피아’다. 주토피아는 기후관문의 발명으로 성립하게 된 세계다. 이곳에서 영화의 시간은 순간을 기념하는 게 아니라 한 세계로 돌아오기 위한 회전문에 가깝다.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일은 탈출의 불가능성이기보다 바깥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안에 손을 뻗는 일에 가깝다. 아무런 것도 바꾸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바꾸고 싶지 않은 단 하나를 위해서다. 이걸 바꿀 수 없는 일로만 생각하면 영화란 결국 우리가 밟고 지내거나, 공간과 함께 쇠락하게 될 곁가지에 불과하다. 영화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재설계되는 과정을 거치고, 이 안에서 처음으로 돌아오는 일은 ‘나’ 자신을 남긴다. 이때 순간은 우리가 부여잡아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니 이 영화는 점진적으로 하나가 되어가는 일을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작품이 전하는 것만큼이나, 서로 다른 것이 하나로 붙어지내는 일은 어설픈 봉합이 아니라 자신의 약한 곳을 서로에 내어줌으로써 더 단단한 하나가 되는 일인 셈이다.
주디와 닉이 버디를 이루어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첫 장면은 전작과 본작 사이의 변화를 보여주는 설정 숏이다. 이들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경찰 제복을 입은 닉의 모습으로 요약된다. 두 사람은 생물학적으로든 성격으로든 무언가 잘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해서, 파트너로서는 서로 맞지 않는 것 같다. 단순히 전작에서 케미가 좋았다는 점만으로는 직장 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보장이 없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닉이 경찰에 입직한 건 주디가 아니라면 일어날 리 없을 일이다. 그말인즉 이 이야기는 주디와 함께하고 싶은 닉의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뜻이다. 자신들이 마주할 결말보다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쪽에 가깝고, 맞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해내보일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회귀라는 말이 아무런 반성이 없고, 기억을 저장하지 못한 채로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일종의 ‘다카포’로 이해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닉과 주디는 자기들이 마주할 결말을 알면서도 사랑했지만, 반대로 처음부터 서로가 잘 맞을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두 사람은 ‘처음’이라는 말이 어떠한 순간을 가리킨다면 반대로 처음도 반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순간을, 티격태격 싸우며 서로가 어떤 모습으로 사랑에 빠지게 될지를 모를 그 순간을 말이다. 영화는 이렇게 등을 맞대지 않으면 서로 알 수 없을 무언가인 것 같다. 우리는 평생 눈 앞을 보지만, 나머지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를 통해 그림자의 세계를 안전하게 건너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