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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림의미학 Aug 19. 2018

오늘 밤, 로맨스 극장에서 - 컬러를 입은 흑백 동화

30대를 넘기며 어쩔 수 없이 사회라는 족쇄에 양보하며 사는 부분이 있다. 그러다 보면 말하기 편치 않은 묘한 자격지심,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숨기게 된다. 내게 그중 하나는 '영화 취향'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로맨스 장르가 가장 좋았다. 근데 나이가 들수록 친한 지인들 빼고는 나 '로맨스'영화가 제일 좋아. 최근 가장 재밌게 본 건 '나의 소녀시대'였어 라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예컨대 미술사가는 14세기 피렌체의 화가의 작품에서 발견한 부드러움과 고요함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을 받아도 결국 맨 마지막에는 조토 시대의 회화 제작 역사에 관한 논문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오늘 밤, 로맨스 극장에서 이 영화도 내겐 그런 영화다. "유치하고, 현실성 없는 로맨스 판타지였어"라고 치부해버리고 싶지만 영화를 보며 내내 울었던 내 마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현실만 쫓고 살아 순수한 마음을 스스로 죽이면서 사는데 반성을 하고 있던 건 아닌지에 대해 말이다.   


로맨스라는 양념을 친 아날로그 영화에 대한 애착.

이 영화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영화 조연출로 일하는 '켄지'라는 인물과 그가 사랑하는 흑백영화 속 주인공 '미유키'와의 로맨스를 담고 있다. 켄지는 너무 오래되어 아무도 찾지 않는 고전 흑백영화 '말괄량이 공주와 명량 쾌활 삼총사'를 매일 같이 돌려본다. 영화를 보기 위해, 그리고, 그녀 미유키를 보기 위해.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청천벅력같은 소식이 찾아온다. 그 영화 필름이 한 영화 수집가에게 팔릴 거라는 소식을. 

내 방 TV 속 작은 영화관

마지막으로 그는 좌절스러운 마음을 애써 달래려 술과 함께 영화를 감상한다. 그 순간,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찾아온다. 마치 하늘이 돕는 것처럼 갑자기 번개가 치고, 흑백 영화 속 '미유키'가 흑백의 모습 그대로 등장한다.

영화는 켄지가 영화 속 그녀를 원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녀는 그의 이상 속 흑백 그 자체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왜 히데키 감독은 그녀를 흑백으로 그렸을까? 아마 로맨스를 가장한 아날로그 필름 속 흑백 영화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이 담긴 마음을 표현하고 싶던 게 아닐까 싶다. 미유키가 등장하는 '말괄량이 공주와 명량 쾌활 삼총사'만 봐도 로마의 휴일, 오즈의 마법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는 켄지를 통해 대중들이 오랜 클래식한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미유키를 통해 과거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흑백영화들이 다시 상영하는 기적을 바랐을지 모른다.


제멋대로의 그녀는 현재의 컬러를 입는다.

미유키는 제 멋대로다. 그녀는 얼핏 보면 이기적이고, 사람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듯 행동한다. 그러나 그녀가 겪었던 세상과 다른 세상에 진입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을 내어준 것이다. 켄지가 사는 세상에 맞추기 위해 그녀는 컬러를 입는다. 제 멋대로 인 그녀가 자신의 몸을 컬러로 맞춘다는 건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시대에 살고 싶은 열망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있다.

미유키가 켄지에게 진실을 말하는 장면, 켄지가 그녀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며 평생을 함께 하자는 장면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극이다. (물론 울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 같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에 빠진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순애보를 가진 사람들도 세상에 0.3%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있다. 그건 바로 우리들이 애정 하는 모든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이다. 우리는 꼭 '사람'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기적을 완성 짓는다고 생각한다. 흑백영화에 격한 애정을 가져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나, 이 말도 안 되는 스토리를 보고 펑펑 울었던 관객들의 순수함, 격하게 사랑하는 취미가 직업이 된 사람들. 이 영화의 초점을 로맨스가 아닌 흑백 영화라고 생각하면 인물들의 감정선이 꽤나 현실적으로 보인다. 


마음은 나이 들지 않는다. 시선이 나이 들어갈 뿐.

삶을 견뎌낼수록 이런 순수함이 사라지니 이 영화가 지극히 유치하거나 감동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 유치해도 좋으니 영화는 좀 더 비현실적이었으면 좋겠다. 의외로 비현실적인 것에서 얻어가는 게 많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로맨스보다는 '영화' 자체에 대한 사랑이 담긴 영화로 초점을 맞추면 더 재밌다. 로맨스는 그냥 상업적인 양념 역할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얼마나 영화 자체에 대한 아이 같은 사랑, 스승을 대하는 존경, 개인의 철학을 담았는지 눈에 보인다. 


마음은 나이 들지 않는다. 단편적인 예로 우리 엄마는 아직까지 어떤 것에 있어서 한결 같이 소녀적인 취향을 고수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라는 탄생이 엄마라는 족쇄를 만들어 나이 들게 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의 시선이 이런 영화를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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