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떠났습니다, 아주 잠시 #02
2월 3일 월요일 오전 7시.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평소와 똑같이 일어났다. 씻고 출발하면 8시 반까지는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평소라면 부지런히 회사에 출근해 아침밥으로 냉장고에 있는 반숙란과 두유를 꺼내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식 중. 오늘은 여행을 떠나는 디데이다. 오후 비행기라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었는데 습관인지 설렘인지 모를 상태로 아침을 맞는다.
평소처럼 카카오미니 스피커를 호출한다. “헤이 카카오, 오늘 날씨 알려줘.” 부지런한 카카오는 휴가도 없이 일을 시작한다. “오늘 서초구 양재동 날씨는 맑아요. 이후 오전 9시에는 구름이 많고 오후 6시에는 맑겠어요. 기온은 영하 2도에서 3도로 쌀쌀할 것 같아요. 미세먼지 농도는 좋음이에요.” 평소라면 여기서 마쳤겠지만 오늘은 한 술 더 떠본다. “로마 날씨는?” “오늘 이탈리아 로마는 구름이 조금 있겠어요. 최저 기온은 9도이고 최고 기온은 19도로 낮에는 포근할 것 같아요.” 오, 생각보다 따뜻하다.
“일어나, 여행 가자.” 아직 눈도 못 뜬 m에게 말했다. m은 스페인 여행의 동행자이자 같은 회사에 다니는 직장 동료다. 나는 d회사 이직 2년 차에 제2의 고향 같던 제주를 뒤로 하고 상경했고, 또 2년 뒤쯤에는 판교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m은 그때 판교로 갓 입사한 신입이었다. 직장 동료랑 같이 살게 된 이유는 우리가 신혼이라서다. m과 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15개월 전인 2018년 10월 결혼을 했다.
m과 나는 아직 같은 회사에 다닌다. 나는 m보다 나이도 많고 사회경력도 길지만 이를 핑계로 m에게 잘난 척할 일은 거의 없다. 팀도 다르고 분야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다. 회사에서는 나도 m에게 평범한 옆 팀 아저씨다. 매일 같이 출근하고, 별 일이 없으면 퇴근도 같이 하고, 서로 밥 약속이 없으면 가끔 점심을 같이 먹을 뿐이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잘난 척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혼자 신나 들떴다는 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m에게는 분명 잘난 척으로 보였을 거다.
m은 회사만큼이나 여행 경험도 적다. 나와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가 첫 해외여행을 세팅해 점수를 땄다. 가까운 홍콩으로 부모님 몰래 가는 도둑 여행을 다녀왔다. 마지막 날 밤, 젊음이 수군대는 홍콩의 밤거리를 거닐다 이브닝 크루즈를 타고 야경을 감상했고, 나는 빨간 돛이 달려 있는 배 위에서 미리 준비해 둔 반지를 꺼냈다. 여행 전 홍대입구 부근 공예 작업장에 나가 직접 만든 투박한 핸드메이드였다. 당연하게도(?) 감동의 눈물을 펑펑 흘리진 않았지만 m은 놀란 눈치였고 우리는 결혼했다.
지금쯤이면 m도 알아차렸겠지만 나도 여행 베테랑은 아니다. 운이 좋아 해외에 나갈 기회가 몇 번 있었던 게 고작이다. 지금은 어떤 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산업부 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취재차 외국에 나갈 일이 종종 있었다. 취재를 아주 잠깐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관광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언론사에서 소속 기자 출장비를 대는 것이 원칙이지만 때론 출입처에서 출장비를 일부 지원하기도 했다. 짬이 안 되는 말단 평기자들은 곗돈 타듯 자기 순번이 오길 기다렸고 나도 그렇게 싱가포르와 독일, 크로아티아를 출장으로 다녀왔다. 영어가 안 되는 평범한 기자들처럼 영문판을 내는 언론사 선배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불러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해외여행 왕초보 m과 덜초보 나의 휴가는 여행지를 고르는 것부터 난항이다. 직접 선택한 여행지에서 쓴맛을 몇 번 겪고 난 뒤 나는 m에게 여행지 선정의 전권을 일임했다. (나도 왜 내가 여름에 더운 곳을, 겨울에 추운 곳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스페인에 가고 싶다고 한 것도 m이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그 이후부터는 내 차례다. 구글 지도와 트리플 앱으로 여행 동선을 짜고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어 비행기 티켓과 도시 간 교통편, 숙소, 관광지 입장권 등 필요한 예매를 정리한다. 직업병일지 모르겠지만 기획자들은 대부분 계획에 매몰된다. 이메일로 온 바우처를 A4용지에 일일이 출력해 바인더에 정리하다 보면 나 홀로 여행지 사전 답사를 와 있는 기분이다. 몸보다 마음이 아주 조금, 먼저 이륙한다.
“매일 같이 출퇴근하면서 여행까지 같이 가면 지겹지 않아요?” 결혼 이후 듣는 질문에 농담처럼 “이제는 혼자 여행 가고 싶어도 못 가요” 하고 답한 적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틀린 답이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는 주로 짜고 달고 느끼한 외국 음식을 먹고, 외국의 낯선 도시 풍경과 외국 사람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대로 m에게 주절주절 수다를 떤다. 서른 중반까지 주로 혼자 놀던 나는 이제 m과 같이 떠나는 여행에 더 익숙해져가고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마트에서 컵라면 한 박스를 캐리어에 담았다. 외국에만 나가면 유독 입맛을 상실하는 m을 위해서다. 혼자였으면 낡은 배낭 하나만 메고 한국 음식은 따로 챙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캐리어 2개에 라면, 햇반, 김치까지 담는다. 새삼스러운 준비가 번거롭지는 않다. 챙길 게 좀 더 많아졌지만 준비하는 즐거움도 늘었다. 내가 컵라면을 챙기는 동안 m은 살뜰하게 상비약을 챙긴다. 내가 깜빡한 준비물이다.
동행이 있는 여행은 어쩌면 직장 생활과 비슷하다. 배경도, 경력도 다른 타인과 함께 하나의 목적지를 향한다. 우열 없이 각자 잘하는 일에 따라 역할을 받는다. 서로 놓치는 것을 챙기며 때론 도움을 주고 때론 받기도 한다. 내게 주어진 대로 뭐든 하다 보면 종국에는 실력이 늘고 능숙해진다. 일 하는 스타일에 따라 우리의 여행 스타일도 비슷하게 구성되고 조정되고 있었다. 컵라면 한 박스에 잘난 척도 없고, 감동의 눈물도 없다. 같이 가기로 했으니 끝까지 함께 할 뿐이다.
저 멀리 로마의 날씨까지 확인했으니 이제 떠나야 한다. 나는 아직 눈도 못 뜨고 있는 m을 재차 말했다. “일어나, 가자.”
2020.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