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bez Jan 04. 2021

나는 지난 겨울
로마의 맛을 알고 있다

회사를 떠났습니다, 아주 잠시 #03

이탈리아 국적의 낯선 여객기는 우리를 스페인이 아닌 로마의 밤으로 데려왔다. 로마에서의 하룻밤은 내 아이디어였다. 어차피 경유하는 항공편이니 콜로세움이라도 보고 바르셀로나로 넘어가자는 제안이었다. 이탈리아에 가 본 적 없는 m도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이제와 고백하자면, 그때 내 머릿속은 온통 다른 속셈으로 가득 차 있었다.


m과 나는 비좁은 이코노미석에서 앞좌석의 받침대를 내리고 두 끼의 기내식을 받아먹었다. 불고기 덮밥과 김치, 고추장, 브라우니가 한데 섞인 국적불명의 식사를 먹는둥 마는둥 했다. 딱딱하게 굳어 엑스칼리버마냥 뽑히지 않는 일회용 포크를 그대로 브라우니에 박아놓고는 로마의 허름한 식당을 떠올렸다. 


나의 첫 로마는 결혼 직전 직장 선배 k와 급 추진된 배낭여행 때였다. 아직 호기로울 때라 “갈까? 가?” 하다가 진짜로 배낭을 메고 훌쩍 유럽길에 올랐다. 다 큰 남자 둘은 가진 건 체력 밖에 없고 남길 건 랜드마크에서 찍은 사진 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열흘 남짓한 짧은 기간 안에 이탈리아 도시 세 곳은 물론 러시아와 체코까지 3개국을 도는 천로역정을 단행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바티칸까지 포함하면 총 4개국을 돌았다. 내가 유럽의 까르보나라를 만난 건 바로 그 고행길에서였다.


k 선배와 나는 러시아에서 맛집 찾기에 실패해 큰 내상을 입은 직후였다. k 선배와 내가 공유한 여행 신조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스노우볼이나 마그넷 따위를 사는 것보다는 맛있는 음식으로 한 끼를 더 채우는 게 더 기념이 된다는 것이었다. 모스코바에 도착하자마자 어릴 적 8비트로 접한 크렘린 궁전 앞에서 테트리스 춤을 추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불곰국에는 도무지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을 찾기가 어려웠다. 보드카 한 잔에 겯들일 음식 주문에 실패한 우리는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그저 그런 감튀를 안주 삼아 씹었다.


이튿날 숙취와 함께 도착한 로마에서도 우리는 밥집부터 찾았다. 숙소 근처 아무 식당이나 골라 잡은 거라 지금 다시 찾으래도 그 집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는 허겁지겁 까르보나라 두 접시와 하우스 와인 1리터를 주문했고, 그렇게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이탈리아의 찐 까르보나라를 영접했다.


로마의 까르보나라는 노랗다. 한국처럼 새하얀 크림이 흥건한 까르보나라와는 확연히 다르다. 소스를 만드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인데, 우리가 까르보나라 하면 흔히 생각하는 우유와 생크림은 들어가지 않는다. 오직 달걀 노른자와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만으로 크림을 치고 베이컨과 후추를 넣어 간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까르보나라는 꾸덕꾸덕함의 절정에 달한다. 크게 말아 한 입 면을 치면 크림 파스타의 촉촉함 대신 쫀쫀함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이런 파스타는 없었다. 이것은 까르보나라인가, 도가니인가. 내가 m에게 로마를 경유하자고 한 것은콜로세움보다도 그때 그 까르보나라를 다시 맛보기 위해서였다.


여행에서의 음식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여행지의 첫인상이 생각보다 별로일 때, 노이즈 캔슬링 없이 듣는 원어민의 영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울 때, 서울과는 다른 공기 속 낯선 이의 암내를 맡아야 할 때,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우리가 밥을 배반하지 않는 것처럼 밥도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나는 직장에서도 밥에 의존하며 생활을 버텨냈다. 한라산 중턱에 위치한 외진 건물로 출퇴근하던 제주 근무 시절에는 회사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매일 한식과 양식 두 가지 메뉴가 나오는데 개중 인기 메뉴는 금방 매진돼서 먹을 수 없었다. 갈비찜이 나오는 날에는 한식이, 돈까스가 나오는 날에는 양식이 일찍 동이 났다. 점심 당직근무가 잦은 일을 하던 나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먹고 남은 메뉴를 먹거나 컵라면으로 떼우는 날이 잦았다. 그날 반찬이 무엇이든 식당 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제주의 오후 햇살과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점심은 꿀맛이었다. 판교로 근무지를 옮기고 나서는 회사 밖으로 나가 점심을 사먹는다. 여기는 구내식당이 없다. 처음에는 사 먹는 밥에 신이 나 국밥, 짜장면, 파스타, 스시 등 나라와 소스를 차별하지 않고 고르게 대우해주었지만 최근엔 김밥천국에만 주로 간다. (김천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식당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건 점심 밥집이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을 몇 개나 받았는지가 아니라 ‘점심이 있는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m은 내 예상대로 노란 까르보나라를 좋아했다. 로마에 도착한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미리 찾아둔 근처 맛집으로 달려가 까르보나라와 봉골레, 맥주 두 잔을 시켰다. 이제 m에게도 로마의 까르보나라에 대한 추억이 생겼겠지 싶어 흐뭇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틀 뒤 로마를 떠날 때까지 다시는 까르보나라를 주문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숙소에서 제공하는 크로아상을 먹고 밖에서는 로마의 피자와 샌드위치, 젤라또 등을 먹었다. m도, 그리고 신기하게도 나조차 까르보나라가 다시 생각나지 않았다.


로마를 떠나는 마지막 날, 아침에 일어나 전기포트로 물을 끓여 컵라면에 부었다. 여행에서의 모든 음식은 추억이 된다. 지난 2017년 가을 로마의 까르보나라가 내게 그랬듯이, 이제는 2020년 봄 로마의 크로아상과 피자, 샌드위치, 젤라또가 나의 새로운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어느새 푹 익어버린 컵라면은 접어놓은 뚜껑을 밀어내고 뜨거운 추억을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었다.


2020.02.03. in Rome.


작가의 이전글 매일 같이 출퇴근하면서 여행까지 가면 지겹지 않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