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직후부터 우리집의 당호를 하나 짓고 싶었다. 방 두 개 짜리 13평 연립빌라든, 24평 아파트든 가족이 깃들면 당호를 붙이리라. 이름은 개인처럼 집에게도 정체성과 지향을 표현하리라. 글씨 쓰는 이를 만나면 전각을 하든 표구를 하든 번듯하게 걸어두리라.
당호 짓기는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걸 찾는 과정이었다. 2년 걸렸다. 결혼 2주년을 한 달 앞두고 ‘수오재’라고 하기로 했다. ‘나를 지키는 집’ 이라는 뜻이다. 수오재는 18세기의 선비 정약용의, 큰형님 정약현이 자신의 집에 지은 이름이기도 하다. 정약현은 막상 커다란 뜻을 당호에 둔건 아니었나 보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태현(太玄)의 뜻을 잘 실현하려는 의미로 지었단다. 형님 집 당호의 뜻을 깨달은 유배지에서의 정약용의 글을 읽다가 감동했다. 우리 부부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뜻과 통한다.
정약용은 1801년 천구교 교난 때 경상도 포항 근처 장기로 유배되었다. 곧 ‘황사영백서사건’으로 다시 문초 받고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장기에 귀양간 직후에 형 당호 ‘수오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천하 만물 가운데 지킬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내 밭을 지고 달아나는 자가 있는가?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나는 자가 있는가? 집도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정원의 여러 가지 꽃나무와 과일들을 뽑아갈 자가 있는가? 그 뿌리는 땅 속 깊이 박혔다. 내 책을 훔쳐 없앨 자가 있는가? 성현과 경전이 세상에 퍼져 물이나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가 있겠는가? 내 옷이나 양식을 훔쳐서 나를 궁색하게 구는가? 천하에 있는 쌀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며 천하에 모든 옷과 곡식을 없앨 수 있느냐? 그러니 천하만물은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오직 나라는 것만은 드나드는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서로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게 못한 것 같다가도, 잠시 살피지 않으면, 어디든 못 가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꾀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이 집을 주면 떠나간다. 마음을 울리고 아름다운 음악소리만 들어도 떠나가며, 눈썹이 새까맣고 이가 하얀 미인의 요염스러운 모습만 보아도 떠나간다. 한 번 가면 돌아올 줄도 몰라서 붙잡아 만류할 수가 없다. 그러니 천하에 나보다 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은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매고 빗장과 자물쇠고 잠가서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으리오. 나는 나를 잘못 간직했다가 잃어버린 자다”
제일 심금을 울리는 문장은 ‘나는 나를 잘못 간직했다가 잃어버린 자다’다. 나도 나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 후 다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갈망하며, 자신을 잃어버리는 걸 두려워하면서 지내 왔다. 법명을 주신 스승님께 이런 말을 들었다. “누굴 구하려고 하지만 자신이 하심이 되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하심으로써 복덕을 삼는다. 너에게는 자기 부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살아가면서 삶의 1순위는 바뀔 수 있다. 0순위는 늘 이것을 두며 지내도록 해라. 진실한 수행자가 되거라” 스물아홉살 때다.
남편에게는 저 말이 ‘실속’이나 ‘가화만사성’이란 뜻으로 들리나 보다. ‘실속’은 그가 가장 미워하면서 좋아하는 말이다. 그의 아버지가 ‘사람은 좋은데 실속이 없다.’는 말을 안팎에서 들었다. 그는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하면서도 사랑했다.
그와 나는 연결성과 신념 테마를 공유한다. 갤럽에서 만든 <강점혁명>에 나오는 강점의 명칭이다. 우리는 점점 넓어지는 동심원에 관심이 있고 책임감을 느낀다. “나는 지구평화에 관심이 있어요.” 슈퍼맨이나 배트맨처럼 그는 말했다. 언제나 자신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먼저 살피고 안정시키는 건, 자기 관리이고, 스스로 샘이 깊은 물, 뿌리가 깊은 나무가 되는 일이다. 원래 길이 있었던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걸어서 길이 만들어졌다던 노신의 시가 되는 일이다. 묵묵히 길을 만들어 가고, 희망이 되는 사람, 자기 원칙에 충실한 사람의 뒷모습과 일상을 ‘수오재’에 담았다. 수오재 당주에게 ‘너나 잘 하세요.’라고 할 필요는 없으리라.
부부의 목적은 ‘다정하게 화목하게 살기’로 삼았다. 관계 자체가 관계의 목적이다. 조셉 캠벨은 결혼을 ‘관계에 자아를 제물로 바치는 희생, 영적 수련’이라고 말했다. 결혼을 베이스캠프라고 말한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쓴 작가이면서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이다. 그는 정상 도전을 위해 꾸리는 베이스캠프가 결혼이라면서 정상도전과 베이스캠프 유지 활동이 어느 한 성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래야 두 사람이 함께 성장할 수 있다. 결혼에 대한 조셉 캠벨과 스캇 펙의 정의 역시 ‘수오재’에 담겨있다. 우린 이 베이스캠프를 잘 가꾸고, 이 안에서 수련하여 성장하고 싶다.
캘리그라피를 하는 지인이 만들어준 결혼 선물. 이 작가에게 당호를 부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