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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Sep 15. 2017

경쟁 사회에서의 예술

무목적의 목적 II


이렇게 ‘좋아하는’ 이가 정성껏 갈고 다듬어 낸 이야기 하나하나는 ‘나’를 넘어서서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루빈슈타인이 아니어도 좋다. 호로위츠가 아니어도 좋다. 나와 같이 숨 쉬고, 나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오는 ‘나’의 이야기 말이다. ‘나’의 모습에는 이 시대 이 사회의 모습이 온전히 녹아 있다.

한국 사회는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매진해 왔다. 얼마 전 한 외국인이, 한국인은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한데 이상하게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다고 지적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고도 성장의 후유증이라고 본다. 흔적을 지우는 데 몇 세대가 걸리나 보다. 지금 불어닥치는 청년실업, 학교폭력, 사회전체에 팽배하거나 팽배했던 우울감 또한 발전과정에서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다.

내가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투명하고 모범이 되어야, 다시 말해 ‘사회적 영웅’이 되어야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이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내 모습을 보여 주고 내 이야기를 하면 된다. 처음엔 당연히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계속하다 보면 스스로 어떤 빛을 보게 된다. 자기 밖에서 자기를 보게 된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뛰어넘을 출구를 찾는 것이다. 자기 안의 장벽을 뛰어넘은 사람에게 외부의 장벽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거북이처럼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결하면 될 뿐. 그래서 진정한 영웅은 ‘나’다. 이것이 루빈슈타인도 좋고 호로위츠도 좋고 나의 이야기도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가치를 찾게 해 준다. 나를 나이게 해 준다. 나로 돌아가게 해 준다. 이 축복은 예술가 뿐 아니라 모든 감상자들에게도 부여된다. 예술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듣는 것만으로도, 느끼는 것만으로도 소통하고 공감한다. 단지 향유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추스르고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 심지어 소진된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걸 넘어서 새로운 힘을 끌어올려 주기도 한다.

예술은 역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인류의 삶에 항상 함께 해 왔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심하여 뭔가 일을 시작하거나 매듭지을 때, 혹은 중요한 의식이 필요할 때, 예술이 늘 그 중심에 자리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은 무목적적이다. 사람 자체가, 생명 자체가 목적이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혼신을 쏟아 붓는 동력도 여기서 나온다. 그 순수한 열정은 어떤 방식으로도 꺾이지 않는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무리 난감해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무목적성이 흔들리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들을 미친 듯이 달려가게 만든다. 모든 것이 정량화되고 상품화된다. 그렇지 않은 것은 도태된다. 정량화는 취업률이라는 이름으로 예술계에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이로 인해 그나마 미미하게라도 존재하던 ‘생존’의 기회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 전문적 훈련을 요하는 클래식 음악의 경우 특히 열악하다.

그러나!

생존의 기회가 줄어들수록 예술은 살아남아야 한다. 이렇게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현대사회를 멈출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그렇게 문득 멈추었을 때 사람이 사는 데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사람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은 분명 예술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오랜 시간 숙성해서 가장 순수한 마음 자체를 보여 주고 사람의 따뜻한 체온을 들려 줄 수 있는 것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사람을 살게 해 주었던 바로 그 ‘희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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