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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Nov 01. 2017

욕망과 욕망 사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욕망 속에 살아간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혹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 싶어한다. 그것이 나의 허전함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내가 갖지 못한 집, 내가 갖지 못한 사랑, 내가 갖지 못한 사회적 지위, 이런 욕망은 때로는 ‘꿈’이라는 그럴 듯한 포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동시에, 우리는 불안해한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얻지 못할까 봐, 혹은 지키지 못할까 봐 불안해한다.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경쟁에서 뒤처져 낙오자가 될까봐 불안해한다. 갖지 못해서 혹은 ‘더’ 갖지 못해서 불안해한다. 사랑받지 못해서 혹은 ‘더’ 사랑받지 못해서 불안해한다. 이제는 왜 불안한지도 모르는 채 불안에 익숙해져 버려 불안할 이유가 없으면 불안할 이유가 없어서 더욱 불안하다. 

인생을 좀 살아본 이의, 미처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불안으로서 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보니까...’라는 명목으로 숱한 형태의 짐이 되어 자녀를 짓누른다. 나도 그랬다. 아이가 재미난 동영상을 보고 웃고 있으면 재밌어서 같이 웃다가도 마무리는 항상 “이제 들어가서 공부해.” 얼마나 바보인가. 이렇게 불안이 전이된 환경에서 자라는 자녀는 쉬어도 쉬지 못하고 공부해도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다. 집중력이 떨어지니 당연히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올 수 없다. 결국 불안은 분노가 되고 폭력이 된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 고리는 악순환한다. 

10대 청소년들의 일탈과 학교폭력을 성장기의 한때 과도한 호르몬의 분비로 이해하기에는 피해자가 받는 상처가 회복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가 많아지고 심지어 이런 뒤틀린 관계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지는 사례를 이제는 접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인간의 순수한 자정능력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것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거의가 외부로부터 온다. 관계로 인해 형성되거나, 지속적으로 미디어에 노출되거나, 혹은 교육에 의해 학습되고 주입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욕망에는 순기능도 있다.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공공의, 인류 보편의 이익에 기여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차치하고, 욕망이 없었으면 인류문명이 지금처럼 휘황하게 빛나지 않았으리라. 지금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옛날 진나라 시황제보다도 훨씬 더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행복한가? 경제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사람도 그가 정말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욕망제조기이다. 제조된 욕망은 상업화되고 상업화되지 않는 것은 도태된다. 그러나 결코 상업화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욕망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과 욕망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욕망으로 점철된 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욕망을 추구하는 동안 소외되는, 정량화되지 않는 가치를 끊임없이 역설한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강아지똥’의 가치를 알려주기도 하고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감자를 먹는 사람’과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서 삶의 진실을 담기도 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욕망을 갈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행복은 욕망을 모두 버렸을 때 찾아온다. 나만을 위한 욕심을 버릴 때, 행복은 우리 내부로부터 샘솟는다. 그 행복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음악이다. 음악은 어떤 매체보다도 강력하게 ‘감정’ 그 자체를 표현한다. 

그래서 인류의 문화와 가장 오랜 기간 함께 해 온 것이 음악이다. 의식요의 형태로 잠들어 있는 세계를 깨우기도 했으며, 전사의 용기를 북돋기도 했으며, 인간의 영혼을 달래기도 했다. 음악에는 사람들에게 공유되어 있는 감정을 가장 숭고하게 그리고 가장 직접적으로 끌어내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와 힘이 지배하는 시대에 음악은 특정계급에게 집중되는, 일종의 특권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가진 보편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음악은, 더 나아가 예술은,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처럼, 세상에서 피되 세상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의 역할은 재화의 생산에 있지 않다. 재화의 생산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예술가의 정신이 그것에 예속될 때 생산되는 것은 균형잡힌, 보기좋은 상품에 다름 아니며 궁극적으로 예술의 몰락을 야기한다. 예술가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후원자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따라서 예술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것은 예술이 본질적으로 가진 아이러니이다. 후원이 필요하지만 결코 후원자에게 무조건적으로 호의적일 수 없다. 탄핵으로 물러난 정권이 놓치고 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예술은 욕망에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아니, 욕망에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살아남는지도 모른다. 예술은 인간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한다. 현대 사회에서 욕망과 욕망 사이를 채워주고 욕망의 불을 식혀 모두가 공생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예술, 오직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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