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고 게으른 자가 텃밭 농사를 하면?
내 생애 첫 텃밭 농사가 제대로 망했다. 무식하고 게으른 자가 텃밭을 일구면 어떻게 되는지 내 텃밭의 처참한 풍경이 그 결과를 보여준다.
모종 판에 씨앗을 뿌리고, 아침저녁으로 조바심을 내며 모종판을 살피고, 앙증맞게 올라오는 떡잎에 환호하고,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줄기와 잎이 대견해서 자꾸만 보고 싶고, 밭에 정식을 하면서는 머지않아 주렁주렁 달릴 열매들을 흐뭇하게 상상하던 나의 지난봄이여! 아! 그때를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벌레가 갉아먹어 바삭하게 부서지는 수박 잎, 숨 쉴 틈 없이 빽빽한 토마토 숲, 손만 대면 툭하고 떨어지는 애처로운 오이, 매일 지치지 않고 잎 뒤에 알을 까는 벌레와 나의 뜨거운 손가락 싸움에 몸살이 날 법도 한데 그런대로 선방하고 있는 가지를 볼 때마다 긴 한 숨이 나온다. 그래도 첫 텃밭 농사가 망해서 참 다행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나의 텃밭 농사가 망해서 정말 다행이다.
만약 운이 좋아서 어쩌다 보니 처음 상상한 그 장면을 보게 되었더라면 나는 내년에도 똑같이 무식하고 게으른 텃밭 농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작년엔 잘 됐는데 왜 그러지? 문제의 원인을 내게서 찾으려 하지 않고, 엉뚱한 데서 찾으려 했을 것이다. 유튜브에 넘쳐나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에 의존하면서, 지금 내가 느끼는 처참함과는 차원이 다른 짜증과 온갖 얄궂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처음이니까, 재미로, 아님 말고의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라 하지만 기왕 하는 거 조금만 더 정성을 들였다면 이 보다는 나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매일 아침 텃밭을 볼 때마다 든다. 물론 성공한 작물들도 있다. 처음 심은 오이(스낵오이)가 하도 비실거려 뒤늦게 텃밭에서 조금 떨어진 땅에 오이를 몇 주 더 심었는데 이 녀석들이 엄청난 건강함을 뽐내며 똥똥한 오이를 생산해내고 있다. 시간대별로 크기가 달리지는 오이를 볼 때마다 기쁨의 비명이 튀어나온다. 헐!!!! 대—-박!!! 아따, 이 맛에 텃밭 하지! 그렇게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각종 허브들(페퍼민트, 오레가노, 타임, 바질, 오팔 바질, 라벤더, 딜)과 아스파라거스, 샐러리, 파슬리도 별문제 없이 잘 크고 있다. 씨를 뿌려만 놓았을 뿐, 정말 혼자서도 알아서 잘 크는 고마운 식물들이다. 딜을 따서 딜-레몬 버터를 만들었고, 바질 잎을 왕창 뜯어다 페스토를 해 먹었고, 고기를 구워 먹을 땐 타임도 넣고, 민트는 각종 음료에 넣어 먹고 있다. 그리고 가을이 오기 전에 잎을 따다가 말려서 두고두고 먹을 계획이다.
첫 농사가 망했으니 다음에는 보다 성의를 다해 공부하고 그것을 토대로 식물이 좋아하고, 일 하기에도 편하게끔 땅을 고르고, 배수가 잘 되도록 두둑을 만들고, 야무지게 심고, 거름도 주고, 지지대를 꽂아 주고, 농약의 편리함 대신 조금 더 수고를 더해 벌레와의 사생결단을 벌이고(이때는 내가 타노스다), 식물이 배고픈 시간에 물을 주고, 그렇게 하면 (그런다고 반드시 싱싱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은 아니지만) 더 큰 애정과 노력으로 텃밭을 가꿀 수 있을 것이다.
내 텃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들로 식탁을 채우는 일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고 큰 즐거움이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작은 열매 하나에 감사하게 된다. 무식함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게으름과 불량한 태도를 버리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겸손한 마음으로. 하... 나는 언제쯤 내가 원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렵다.
ps. 수박은 6-7kg까지 자라야 하는데 더 이상 광합성을 할 잎이 남아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1kg이 조금 넘는 미숙한 열매를 수확하고 뿌리를 모두 뽑아버렸다.
토마토는 지난 비바람에 줄기가 꺾어진 애들을 솎아 냈다.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인데. 부실하기는 해도 살아남은 애들은 이제 숨통이 좀 트이겠지.
남들은 기록용으로 사진고 찍고 하는데 본인은 텃밭 사진 한 장 없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