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어느 햇살 좋은 초가을 아침 우리는 만났어. 어미 곁을 떠나기에 아직 어려 보이던 너는 호기심과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지. 그날을 떠올 일 때마다 내 가슴은 사랑으로 몽글 거려. 너처럼 작고 연약한 고양이가 어미 곁을 떠나 홀로 살아남은 것이 짠하고, 대견하고, 내 앞에 나타난 게 기적인 것만 같아 지금 내 옆에 있는(물론 지금은 몰캉몰캉 뱃살이 찰랑거리는 통통한 성묘가 되었지만 말이야.) 너를 자꾸만 안아주고 싶어.
사람들이 ‘나만 없어, 고양이.’ 할 때 도대체 고양이의 매력이 뭐길래 저러는 걸까? 했었고, 반려 동물은 무조건 개가 최고라 했었는데 너를 만나고, ‘나는 있지롱, 고양이.’ 자랑하고 싶어 졌어. 루를 만나고 반려 동물과 함께 하는 삶, 다른 언어를 가진 존재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알게 되었고, 너를 만나면서 그 사랑은 더 크게 확대되었단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정확히는 내가 주는 밥이었겠지만) 너를 보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피곤함을 잊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하루를 시작할 힘이 나더구나. 내 일상에 네가 있어 좋았어. 그래도 너를 내 공간 안으로 데려올 엄두는 내지 못했단다. 루와 함께하면서 커지는 사랑만큼 두려움도 커졌기 때문에 또 다른 두려움을 굳이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거야. 너와의 교집합은 일터로 만족해야 했지.
네가 나타난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출근한 날) 만났어. 내가 퇴사를 결심하고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이 바로 너였을 정도로 너에 대한 마음은 크고 단단했지. 그런데 며칠 동안 네가 보이지 않는 거야. 누가 너를 납치한 것은 아닌지, 다른 고양이와 싸우고 크게 다친 것은 아닌지,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닌지, 골목골목 너를 찾으러 다니며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그때 결심했어. 네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렇다면 너를 데려오겠다고. 너의 안녕을 책임지겠다고. 너는 이미 밥 걱정은 없는 길냥이 기는 하지만 길냥이 평균 수명이 3-4년이라는 말에 내 결심을 더 굳혔던 것 같아.
특유의 느긋하고 능청스러운 귀여움으로 사랑을 많이 받은 너는 사람에 대한 경계가 고양이 답지 않게 없었어. 그래서 너를 데려오는 일이 나는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어. 너를 마냥 예뻐만 했지 고양이의 이동, 환경의 변화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지. 그래서 너를 케이지에 넣고, 너의 쉴 새 없는 울음, 공포에 패닉 된 너의 몸부림을 보았을 때 나 역시 너 못지않게 충격을 받았어. 너의 안녕을 책임지려고 시작한 일인데 내가 너에게 무슨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너에게 미안하고, 신중하게 선택했다고 했는데 짧은 생각이 아니었나. 너무 두려웠어. 얼마나 용을 썼던지 다음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니까?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내 오피스텔에 도착해 케이지 문을 열어주자 너는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을 커다래진 눈으로 두리번거렸지. 나는 겁에 질린 너에게 서둘러 츄르를 뜯어 주었어. 다행히 너는 츄르를 맛나게 먹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도망치듯 복층으로 올라갔단다.
나를 보는 너의 눈빛은 괴물을 보는 어린아이의 눈빛이었어. 매일 아침 나의 출근을 기다리던, 나를 보면 바닥에 등을 대고 뒹굴거리던 너는 나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경계했었지. 기억나니?
밥그릇과 물그릇을 복층에 올려주고, 나는 다시 아래로 내려와 언젠가는 네가 경계를 풀고 예전처럼 완전한 신뢰를 보여주기를 기도했단다.
일주일 동안 너는 밥 먹고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곤 하루 종일 화장실 구석에 숨어 있고, 현관 옷장에 숨어있고, 복층 구석에 숨어있다가 새벽이 되면 나에게 항의라도 하듯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서럽게 울어댔어.
'도대체 여기는 어디냐! 죄다 이상한 냄새뿐이다! 나를 왜 여기에 데려 온 거냐!’
과연 네가 집냥이의 삶에 적응하는 날이 올까, 불안했지만 수의사들이 하는 유튜브를 보면서 내가 혼란스러운 것보다 너의 힘듦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결국 필요한 건 시간과 나의 관심, 노력이라는 것을, 고양이에 대해 공부하고 네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렸어. 그리고 신기하게도 일주일 하고도 며칠이 더 지나자 거짓말처럼 너는 새벽 울음을 멈추었지. 내가 손에 츄르를 들고 있으면 먼저 다가와 예전처럼 네 몸을 내게 비비고, 사냥놀이도 하고, 스크레치도 열심히 하고, 이 박스에서 저 박스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네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더구나.
이제 겨우 적응을 했나... 싶은 시점에 너는 다시 한번 대변화를 겪어야만 했어. 그때 나는 또 얼마나 긴장하고 걱정했는지. 너를 처음 데려올 때 너의 울음을 기억하기에 4-5시간의 이동이 네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일까, 마음 같아선 수십만 원짜리 이동 케이지를 사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사인 나는 내 형편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찾아보고 마련하고, 시뮬레이션해 보면서 내 나름의 노력을 했단다. 사실 별건 아니었지. 하네스 메는 연습, 이동 가방에 들어가는 연습, 뭐 그게 다였으니까. 이동하는 동안 네가 울까 봐, 케이지에서 탈출하려고 발버둥 칠까 봐, 그것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나는 네가 장거리 이사로 완전히 내게서 마음을 닫을까 그게 두려웠어.
물론 너는 울었지. 울다가 멈췄다가 다시 울기를 반복하면서 결국엔 네 나름의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더구나. 오히려 내가 과하게 긴장을 해서 호들갑을 떨었지 넌 처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의젓했어. 긴 이동이 끝나고, 내 짐을 정리하기 전에 먼저 너의 화장실, 밥과 물을 준비하고, 네가 어디에 숨어 있나 확인을 했지. 너는 내 책상 밑에 엎드려 잠깐 경계를 하는가 싶더니 금세 잠이 들었어. 그리고 일주일 동안 새벽 한 두시부터 너의 울음이 시작되었지. 처음보다 우는 시간은 짧아졌지만 낯선 냄새를 맡으며 소리 내어 울어야만 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듯 넌 열심히 울었어. 그리고 결국 적응했지.
어디에 숨어야 가장 안전한지 알기 위해 온 집안을 구석구석 탐험(이 집의 구조를 완벽하게 익히겠다는 각오로)하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싸고, 그렇게 10개월이 되었구나.
나는 이제 너의 울음소리에 눈을 뜬다. 눈을 뜨면 너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나를 보고 있고, 일어나는 순간부터 네게 아침밥을 대령하는 그 순간까지 나를 졸졸 쫓아다니며 밥 내놓으라 우는 너에게 나는 괜한 앙살을 부리고, 울 때 특유의 표정, 삼각형이 되는 너의 입모양과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너를 자꾸만 놀리고 싶고...
너의 식사를 준비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빗질을 해주고, 눈곱을 떼어주고, 양치질, 먹는 약, 바르는 약, 너의 청결과 건강을 체크, 체크, 체크, 집사로서의 의무를 다 하려고 나름 애를 쓰고 있다. 부족한 나의 보살핌에 무던하게 별문제 없이 잘 적응하고 있는 너도 나름 애를 쓰고 있는 거겠지.
중간에 혹시나 네가 두부 모래에도 잘 적응하지 않을까?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화장실 모래에서 벗어나고자 욕심을 부렸다가 하루 만에 절반으로 줄어든 배설물 양에 놀라고,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일단 지켜보자 했다가 일주일 뒤 너의 목에 커다랗게 생긴 멍울에 또 놀라고, 이 시골에서 너를 데리고 어느 병원에 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또 일단은 좀 지켜보자, 결국 그렇게 2주가 가고, 원상복귀가 안 되는 배설물 양에 왕창 사놓은 두부 모래 아까워할 때가 아니다 서둘러 벤토나이트 모래로 다시 바꿨더니 하루 만에 사라진 멍울과 이틀 만에 원상 복귀된 너의 어마어마한 감자(소변)와 맛동산(대변)을 캐내면서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화장실 실험을 끝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반성하고, 감사하고, 미안하고.
너와 함께 하는 삶은 이유 없는 웃음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고, 말도 안 되게 부드럽고, 포근하고, 한 마디로 좋은 삶이야. 그날 그 아침에 네가 내 앞에 나타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의 운명은 그날 이미 결정된 것일까? 하하하. 좀 간지럽지만 너를 가만히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한 집사지만 너와 나의 따로 또 같이 행복을 위해 노력할게.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건 다음 편지에 쓰기로 하고, 이만 줄인다.
덥다. 2022년 엄청난 더위, 우리 잘 이겨내 보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