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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Jan 23. 2024

반갑지 않은 미래

거리두기는 과연 가능할까?

어린 시절 범죄사건을 다룬 탐사보도 프로를 본 날이면 그날 밤은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tv에서 본 범죄사건이 오늘 당장이라도 나와 내 가족에게 닥칠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빠의 퇴근을 기다렸고,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나를 납치라도 하지 않을까, 무서워했다. 방송을 본 이후 내게 세상은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불안전한 곳이 되었고, 타인은 내게 무해하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방송에서 본 내용을 만나는 사람마다 전달하며 조심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가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들이 바짝 긴장된 시간을 밀어내면서 세상은 다시 살만한 곳으로 변했다. 자연스럽게 공포는 그 힘을 잃어갔다. 나는 전과 다름없는 명랑한 어린이가 되었다. 그리고 잠을 설치는 날들이 왕왕 찾아왔지만 시간이 흐르고 어린이에서 청소년이 되면서 나는 나를 사로잡았던 공포를 극복하고 방송에서 본 범죄와 내 일상에 거리를 둘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게 되었다.


한 시간이 채 안되는 1회 방송이었을 뿐인데도 초등학생 어린이의 정신을 완전히 점령한 방송의 힘은 강력했다. 만약 이런 방송을 주기적으로 시청했다면 이야기에 쉽게 몰입하던 나는 불안정한 유년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나의 어린시절에 인터넷은 존재하지 않았고, tv 시청 시간도 제한적이었기에 방송 시청은 일회로 그쳤고, 그에 대한 기억을 환기할 기회의 부재로 공포를 빠르게 떨쳐낼 수 있었다.  


훗날 학교에서 미디어의 힘에 대해서 배운적이 있다. 그 예로 히틀러와 괴벨스의 대중선동이 매번 인용되었는데 정치에 대해 문외한이던 내게는 이 무서운 이름들보다 광고가 자극하는 소비심리, 미디어가 퍼뜨리는 고정관념(흔히 미의 기준 같은 거)이 미디어의 힘을 실감하기에 더 적절해보였다. 과장인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심리를 자극하는 광고들. 그것들을 경계하면서도 결국에는  ‘속는셈치고’ 스스로의 무력을 인정해버리는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의 관찰자이자 주인공인 나를 자조했다. 그리고 2024년 나는 이 광고들에 완전한 백기를 들었다. tv와 잡지에서만 접하던 광고들이 이제는 핸드폰만 열면 아니, 핸드폰을 열지 않아도 알아서 딩동딩동 알람을 울리며 우리를 유혹하지 않나!

-70%!

역대급!

오늘이 마지막!

아무생각이 없다가도 이 단어들을 보는 순간 ‘구경이나 해 볼까?’ 광고를 누르고, 조금전까지 필요한 줄 몰랐던 물건들이 필요해지게 된다. 정신 똑바로 안차리면 존재하지도 않는 장바구니에 물건만 담다가 하루가 다 갈수도 있는거다. 내가 감히 상상해 본적도 없는 미래가 나는 전혀 반갑지 않다. (심지어 핸드폰이 우리의 일상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들도 왕왕 있다.)


내가 대중선동의 도구로서 미디어의 힘을 체감하기 시작한 것은 십수년전부터이다. 그때 나는 전에 없던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트위터와 팟캐스트 등 인터넷, 스마트폰의 발전으로 가능해진 여러 형태의 플랫폼에서 정치관련 채널들을 구독했다. 그리고 이 채널들은 나의 관심이 확장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나의 뉴스 해설자였고, 선생님이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나의 관심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들의 해설에 의지한 부분들이 적지 않지만 나는 내가 이들 채널을 통해서 권력자들의 말과 행동, 그것을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 그 이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원래 존재하고 있었으나 나는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되었고, 술자리에선 친구들과 그것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잔뜩 흥분해서 특정 정치인들을 욕하고 서로의 뜻이 같다는데서 위로를 받았다. 내가 즐겨듣던 방송은 신드롬이라 할만큼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정보력, 솔직하고 날카로운 해석, 화려한 언변과 재치에 열광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방송을 기다렸고, 신명나게 들었고, 좋아했다. 나는 그것이 21세기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뀔수 있을거라 믿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나는 ‘모두’가 ‘우리’와 같을 거라고 착각한거다. 선거가 치뤄졌고, 나는 좌절했다. 쇠파이프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당시 내게 ‘다른 생각’은 곧 ‘틀린 생각’이었다.

그건 상대쪽도 마찬가지였을 텐데말이다. 선거후유증은 꽤 오래갔다. 나는 정권이 하는 일이라면 일단 비판부터 하고 봤다. 많은 사람들의 문제제기가 묵살되었고, 달리 대안이 없던, 수동적인 일개 국민의 한 사람.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진짜 혁명이 일어났다. 시작은 한 채널의 뉴스 보도였다. 보도 이후 다른 모든 매체가 그 뉴스에 달려들었고, 전국민이 분노했다. 무엇이 이런 흐름을 만들었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정말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 아니야?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들었다. 부상을 당한 사람도 죽어나간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살아서 세상을 바꾸었다.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세월호 진상규명이 될 거라고 믿었고, 검찰 개혁이 될 거라고 믿었다.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무력한 개인으로 돌아온 나는 혼란스러운 개인이 되었고, 결국 냉소로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닌지, 이런 내가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이렇게 무력감을 느끼는동안 누군가는 차곡차곡 분노를 쌓아가고 있었다. 최근에 끔찍한 폭력으로 자신의 분노를 실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뉴스를 보았음에도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건이었다. 무서운 것은 그가 평범한 60대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를 아는 지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평소 그는 매우 점잖고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광분해서 돌변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대체로 조용하고,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모습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무엇이 그의 손에 칼을 쥐게 만든 것일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투사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믿는 정의 실현은 자신이 ‘악마’로 생각하는 대상을 처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악마’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개인 채널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강한 말로 쏟아내고 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말하는 사람, 자신의 후원자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 ‘어떤 흐름’을 만들고, 여론을 선동하기위해 말하는 사람, 분석하는 사람, 화내는 사람, 욕하는 사람, 조롱하는 사람, 호소하는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 등등등. 어떤 말들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고, 어떤 말들은 그저 슬프고, 어떤 말들은 답답하고, 어떤 말들은 옳소! 하지만 그래서… 뭐? 하고, 대체로 무심하다. 2024년의 나는 10년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정치관련 채널들을 소비하지 않는다. 손에 칼을 쥔 남성이 주로 보고, 듣고 열광했다는 채널들은 한 번도 본적 없다. 보고 싶은 마음이 없고, 생각만으로도 굉장한 피로감을 느낀다. 개인의 성향차이를 떠나서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가치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혼란스럽다. 그 남자의 분노를 자극한, 그것을 노린( 이런 결과를 예상한 것은 아니겠지만) 무언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하나? 처벌을 하거나(과연 가능은 한가?) 법적 제재를 가한다면 이처럼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글쎄… 나는 거기에 회의적이다. 한번 생겨난 것은 사라지지 않고, 그 모습을 변형해서 계속된다. 하나를 없애면 다른 하나가, 아니 두개가 생겨나는 것이다.


점점 복잡해지는 세상, 과거와 비교해서 좋아진 부분이 있는 만큼, 나빠진 부분이 있다. 그것을 균형이라고 보기는 힘들것 같다. 우리는 항상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애쓰지만 극단으로 치닫는(이 문제는 유럽이든 미국이든 한국이든 다르지 않는것 같다.)부분에서만큼은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대안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2014년 개봉한 영화 ‘디태치먼트(detachment)’에서 기간제 교사 헨리(애이드리언 브로디)는 학생들에게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우리의 사고가 무뎌지게 만드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의식과 신념을 쌓아가기 위해서.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정신을 무디게 만드는 힘에 저항하기 위해서’


적극 동감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사회가 아주 어릴때부터 토론을 일상화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내 의견을 내세우는 것 만큼 타인의 주장에 귀 기울이고, 단지 상대의 논리가 탄탄해서 내가 졌다.가 아니라 상대의 의견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는 유연한 태도를 기르는, 그런 교육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거리두기’(미디어와의)를 덧붙이고 싶은데 스마트폰이 내 손에 있는 이상 그건 힘들겠지?



 추신. 이글을 쓰면서 생각한 드라마를 두 편 추천한다. (공교롭게도 둘 다 영국 드라마?)


1. blackmirror 시즌3 ep6. <미움받는 사람들>

https://youtu.be/jDiYGjp5iFg?si=VcrFl7gQPURbzski


2. 이어즈 앤 이어즈

https://youtu.be/9jLbW0CIt88?si=GnzjwQre6DpYvkg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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