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과 물건의 관계
무인양품의 뜻풀이를 보자면 無(없을 무), 印(도장 인), 良(어질 양), 品(물건 품)이다. 도장이 없는 양질의 물건이다. 도장과 물건은 어떤 관계일까. 소고기를 생각해보자 A, A+, A++ 까지 등급이 매겨지고 이는 보라색 도장으로 찍힌다. 어떤 품질의 보증 혹은 상징성을 가지며 현대의 브랜드, 로고와 유사한 의미다. 실제로 브랜드의 기원은 "도장"과 비슷하다.
브랜드(brand)라는 단어는 노르웨이 고어 ‘brandr’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단어는 ‘태운(to burn)’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보여 주듯 고대 유럽에서 가축의 소유주가 자기 가축에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명시하던 사례에서 파생했다고 보는 것이 브랜드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생각이다.
도장과 물건은 서로 깊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도장은 물건에 붙어 로고, 혹은 브랜드라고 불리며 물건에 대한 표식, 상징성, 믿음, 스타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도장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상에 모든 물건에 상표, 브랜드, 로고가 표면적으로나마 배제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 물건에 대해 알기 위해 도장이 없을 때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동시에 그 물건 자체로, 보다 객관적으로 물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1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가지의 취향이 있다. 입맛 또한 그러하다. 고기의 등급은 과연 모든 취향을 아우를 수 있는 기준일까? 또한 맛 이상으로 더 많은 가치를 한 번에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쉽지 않을 것이다. "브랜드"라는 키워드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제 개개인도 브랜드 취급을 받는다. SNS는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공간이고, 이것은 개개인의 브랜드화를 가속하고 있다. 팔로워가 수천, 수만이 되는 SNS 계정은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며 굉장한 파급력을 지닌다.
이처럼 바야흐로 브랜드의 전성시대에 도장이 없는 양질의 물건을 지향하는 무인양품은 무엇을 팔고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무인양품은 소비에 대한,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버블경제 당시의 소비에 대한 안티테제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 많은 소비들은 굉장히 브랜드 지향적, 브랜드 의존적이다. 물론 과거에 비해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해졌다. 단순히 품질이 좋고 나쁨에서 조금 더 예쁘고, 환경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심지어 나아가 생산과정에서의 진심, 진정성이 물건의 가치를 결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또한 도장으로 존재한다. 유기농 마크 따위처럼 말이다.
“정부 믿었는데…” 인증제도의 배신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71186
브랜드 지향적인 소비는 결국 그에 걸맞은 결과로 나아간다. 도장, 표식에 연연한 제품 생산과 소비, 실질적인 품질, 진심, 진실에서 멀어지는 소비가 되고 만다. 결국 주변에는 그런 물건만이 넘쳐나게 될 뿐이다. 무인양품은 이런 도장과 물건의 관계에 대한 고찰에서부터 시작된다. 도장이 부재한 물건 자체의 본질에 대해 집중하고자 한다. 무인양품에서 판매하는 모든 물건에는 도장, 무인양품 제품이라는 어떠한 표식이 없다. 무인양품의 제품이 어딘가에 놓여있다고 할 때, 무인양품의 몇 천 가지 제품 중에 확연하게 눈에 띄는 제품은 10가지도 체 안될 것이다.
무인양품에서 판매하는 물건의 가장 큰 테마는 "이것으로 충분한"이다. 내가 필요한 어떤 물건이 있을 때, 무인양품 매장에서 그 물건을 구매한다면 손에 들고 그것을 사용할 때, 어딘가에 그 물건을 놔두었을 때, 그 모습이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지만 특별히 거슬리거나 이질적이지 않은 것. 동시에 품질 또한 아주 좋거나 최첨단의 기술은 아니지만 사용하기에 아주 모자라거나 품질이 나쁘지 않은 것. 환경과 사회에 필요 이상의 무리를 주지 않는 제품. 무인양품의 제품은 그 지점에 놓여있다.
종종 유명한 브랜드 혹은 값비싼 브랜드의 제품에 "브랜드 값, 로고 값"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물론 그 브랜드, 로고에 어떤 감성, 문화적인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단어의 존재는 도장, 로고가 증명하는 어떤 믿음 혹은 가치, 상징이 물건과 다소 괴리가 있다는 걸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인양품의 제품은 도장을 없애고 물건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합리성에서 분명 "합리적인 가격"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중이 생각하는 그 "합리적인 가격"은 "저렴해야 할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합리성이 곧 저렴함은 아니다. 가격의 합리성이란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공감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 구매하고 싶은 가격이 과연 판매하고 싶은 가격과 너무 괴리가 있는 것은 아닌지, 대중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가격이란 한쪽에 치우친 것은 아닐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무인양품이 국내에 진출한 지 14~15년 정도가 되어간다. 그동안 모든 제품의 가격은 꾸준히 낮아지고 있다. 올라간 제품은 사양, 디자인, 혹은 생산지가 변경된 경우를 제외하고 단 한 개도 없다. 한국에서 제품이 더 비싼 이유는 한국에 수입되는 수량 자체가 아직은 적고, 수입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통관 절차와 세금 문제가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이 적지 않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 전자제품 통관 과정이 굉장히 까다롭다. 전자제품의 경우 일본과 가격차이가 많이 나는데 국내 판매 제품 중 마진이 가장 적은 상품 군이다.
아래 링크는 어느 커뮤니티 반응이다. 게시일은 2018년 3월로 당시 판매 가격도 199,000원이었지만 몇 년 전 가격이 표기된 이미지가 게시되어 오해를 사고 있다. 무인양품 모든 제품의 전 세계 공급 원가는 현지를 포함하여 전부 동일하게 책정된다. 다만 국내 판매가의 경우 환율과 물류비용 통관, 검사 비용 등이 포함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보상판매 형식으로 A/S도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을 호구로 본다는 댓글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는 "한국이 한국을 호구로 본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심지어 일부 댓글은 가품 이어도 저렴하면 장땡이라는 반응이다. 창작과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다소 아쉽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1879235
무인양품 제품 택 중 일부는 글로벌 프라이스 택이다. 달러, 엔화, 원화, 위안, 유로 등 약 10가지의 화폐 단위로 가격을 표기해두었다. 판매자 입장에서는 다소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무인양품이 비싸다는 인식이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그런 택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인양품이 그 택 안에서도 세계의 여러 나라의 가격을 최대한 비슷하게 맞추고자 하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소 글이 길어지면서 먼 길을 돌고 길을 잃은 느낌이지만, 요약하자면 무인양품은 물건과 도장의 관계에 대한 기존 관념을 바꿔보고자 시작되었으며 부족하지도 않지만 과하지도 않은 그런 적당한 지점에 존재하는 물건들을 만들고 있다. 브랜드, 도장에 대한 부정의 지향점은 저렴함이 아닌 합리성에 있다. 그런 점에서 다소 잘못 알려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한국에서는 무인양품을 소비하는 것이 감성소비, 감각 있는 소비, 특별한 소비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사용자가 만족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만 무인양품은 보다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매장에서 직접 소비자를 마주하고 근무를 했을 때 "써보니까 좋더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뿌듯한 마음이 있었다. 무인양품은 연령, 지역,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사용하는 것이 되었으면 한다. "무인양품"이라는 이름 때문에 같은 제품이 더 특별해진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방향은 아닐 것이다.
현 한국 무인양품 나루카와 타쿠야 대표이사의 강연 중 신세계 그룹에서 전개하는 JAJU라는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최근 JAJU는 무인양품과 유사한 라탄 수납 상품을 전개하고 있다. 라탄 바구니가 무인양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JAJU는 무인양품을 노골적으로 카피하는 브랜드다. 이에 대한 나루카와 대표이사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어떤 제품이 그 품질과 가격을 고려해봤을 때 단지 무인양품 제품이기 때문에 소비되는 것은 무인양품이 지향하는 방향이 아니다. 물건만 놓고 봤을 때 사용자가 선택할만한 품질 대비 가격 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래서 무인양품 제품을 찾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인양품에서 개선해나가야 할 부분이다."
나는 무인양품을 좋아한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도 물론 무인양품을 제대로 알리고 싶지만, 단지 무인양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제품을 보다 합리적으로 더 좋은 가격으로 구매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다양한 것들의 가치를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켓 컬리의 새벽 배송이 굉장히 편리하고 좋아 보일 것이다. 실제로 편리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서비스를 위해 수반되는 많은 인력과 노동강도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치킨을 시켜먹을 때 부가되는 배달비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다. 배달비는 당연한 것이다. 가게에 앉아서 먹는 것과 시켜먹는 것의 가격이 같은 것 자체가 비정상이다. 한국처럼 식당에서 먹는 물, 밑반찬이 당연한 서비스처럼 여겨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무인양품은 저렴하지 않다. 단지 저렴하기 위한 브랜드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다만 법, 제도 등 외적인 요소와 공정, 자재 등 내적인 요소가 공존하고 있어 다방면에서 노력과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돈은 좋다. 나도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돈과 어떤 것을 바꾸던 돈, 가격 이상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그 가치에 알맞은 돈을 지불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