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널과 LG 트윈스, 무인양품과 나이키, 브랜드에서 사람까지,
4월 4일, 모교 국민대학교에서 진행되는 취업 DAY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사실 학교 생활을 정말 열심히 하지 않았기에 이런 제안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내가 말한 학교 생활이란 철저히 내 관점으로 학교 공부에 성실히 임하여 좋은 성적을 내고, 학교에서 주관하는 교내 활동과 프로젝트에 열심히 참여하며, 대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교외 활동부터, 인턴을 비롯한 다양한 자격증과 시험 성적을 준비하는 취업 준비, 대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선배와 후배, 교수님까지 이어지는 인적 커뮤니티의 구축 등이다.
특히 간판이 <취업 DAY> 였기 때문에 더욱 부담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취업에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취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나한테는 큰 의미가 아니었다. 세상에 일 할 곳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뭔가 나는 너무 일을 하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의 유무를 떠나 정말 생계유지 도구로서 일이 필요한 정도라면 일 할 곳이 없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면서 내가 즐거울까, 라는 부분이 나에게는 제일 중요했다. 이런 생각은 내가 공부하던 대학을 떠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독특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취업이 주제인 어떤 자리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는 행위는 그들의 기대와 매우 다를 수도 있고, 심지어 도움은커녕 괜한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그 생각 자체가 굉장히 편협하고 꼰대스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실 나는 앞서 언급한 대학생활에 걸맞다고 여겨지는 여러 활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랑 상관없는 일 이상으로 조금 싫어한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돈과 학벌, 사회적 지위와 권력에 많은 관심을 두고 그것은 곧 사회를 향해 폭력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학교의 선후배 군기 문화라던지, 나 같은 경우에는 경영학과였기 때문에 은행에 취업한 선배들이 치킨 몇 마리와 함께 통장 신규 개설 신청서 같은 것을 학회실에 두고 가기도 했다. 이게 선후배 간의 암묵적 의리 같은 것이었다. 술자리에서도 직업에 대해 다양한 질문, 학문적 고찰, 가치관에 대한 고민이 아닌 "연봉 얼마 주는 회사 가고 싶냐?", "이 정도는 받아야지"같은 질문과 반응들이 어떤 디폴트를 만들어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대학생활을 경험한지도 꽤 지났고, 실제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당시에도 다양한 가치관을 갖고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은 그 당시보다 더욱 다양해진 것 같고, 마음속에 대학교, 대학생에 대해 편협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않았나 반성하고 열심히 준비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기는 취업에 대한 어떤 팁, 정말 도움이 되는 효율적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어떤 요소 때문에 지금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도 잘 모른다. 그리고 내가 이 일을 잘 해내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대단한 업적을 쌓았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도 아니다. 단지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라는 이야기와 "좀 더 내키는 대로 살아도 돼"라는 메시지였다.
인터뷰처럼 강연도 준비 과정에서 많은 고민이 수반되다 보니 그에 따른 결과로 나름 많은 답을 얻는다. 광고, 마케팅, 브랜딩에서 대해 생각하다 보니 결국 인력시장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무래도 무인양품이 최근 조금씩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는 이유는 도장이 없는, 로고, 표시가 없는 탈 브랜드적인 지향점에 대한 공감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무인양품은 광고가 없다. 발뮤다, 이솝, 아크네, 프라이탁 등도 그러하다. 우리가 브랜드라고 칭하는 것들의 본질은 물리적인 제품, 유용한 기능, 심리적인 만족 등을 제공하는 재화가 본질이다. 광고를 비롯해 마케팅이라고 불리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그런 본질을 구체적인 수치 혹은 문자, 이미지 등으로 표현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고, 마케팅은 포장지다. 알맹이는 그 어떤 만족감, 유용성을 주는 유, 무형의 재화다.
포장지가 알맹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면, 왜곡해서 드러내게 된다면 그에 따른 수요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과거 70-90년대 광고를 살펴보면 광고 안에 구체적인 제품이 등장하고 맛있다던지 유용하다던지 그런 것들을 굉장히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영상뿐만 아니라 음향이나 설명, 문구 등도 함께 사용된다. 그리고 그 이후로 넘어오면 기업의 이미지 광고, 이념 광고 등이 많이 등장한다. 구체적인 제품, 형태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지금까지도 좋은 광고로 여겨지는 광고들은 대부분 제품이 등장하지 않는 광고다. 과거의 맥킨토시가 그랬고, 지금의 나이키가 그렇다.
뒤이어 최근에는 브랜딩이 각광받고 있다. 네이버, 11번가, YG, CU 등 많은 브랜드가 리브랜딩, 브랜드 컨설팅을 통해 역량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고, 그게 꽤 유용하다는 건 이미 증명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브랜딩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핵심인 재화를 조금 더 구체적인 형태, 색상, 인터페이스 등으로 표현하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무인양품이, 그리고 광고가 없는 상기의 몇몇 브랜드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이제는 브랜딩이라는 도구 없이도 제품, 재화의 가치는 충분히 드러날 수 있고 그 알맹이 자체만으로 비치고 소비되는 것이 시대가 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연 어떤 브랜드와 소비자 간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건 사회 전반적인 흐름을 공유하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인력 시장의 변화를 살펴보자. 인력 시장의 문제는 고용주와 피고용주 사이의 정보가 다소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이런 채용과정에서 불투명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에는 자격증, 스펙, 시험성적, 대학교 졸업장, 학점 등의 기준으로 인력을 평가하고 채용해왔다면, 이런 기준들이 과연 유효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위와 같은 수치화된 어떤 요소들이 대변해줄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 성실도, 계획성, 인내심 등을 미뤄짐 작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복잡한데, 그런 단순한 척도로 사람을 알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인턴과정이 생기고 그 과정도 3개월에서 6개월, 1년을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곳도 있다. 더불어 자소서가 중요하다는 시대가 지나고 다양한 대외활동을 비롯해 인적성검사와 심층면접, 합숙면접 등이 생겨나고, 지금은 공채, 신입사원 채용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 그럼 "사회초년생은 어디서 경력을 쌓으라는 말이냐?"식의 글을 봤던 기억이 난다.
경력직이나 알음알음 인맥을 통한 채용, 플랫폼으로는 링크드인 같은 형태로 취업의 트렌드가 흘러가고 있다. 유용했던 자격증이나 토익 토플 성적, 대외활동 등은 과도한 경쟁을 거쳐 넘쳐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특별한 것이 아닌 누구나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없으면 뒤처지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모두 똑같다. 언젠가부터 모두가 같은 스펙을 쌓고, 똑같은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때, 독특한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장과 함께 소위 전형적 취업활동을 준비하던 이들은 큰 상실감과 배신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하지만 사회는 이미 변하고 있다. 한 때 독일 축구는 효율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는 축구로 불렸던 때가 있다. 스포츠 팀을 살펴보며 든 생각이 있다. 특히 한국 야구계를 살펴보면 정말 잘 알 수 있다. 물론 많은 야구팀은 지역을 기반으로 팬층을 형성하고 있지만, 팬들은 사실 그들의 좋은 성적이 아니라 변함없는 그들의 스타일, 그 팀 다운 모습을 언제나 기대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부터 직업의 귀함과 천함을 나누고 있지만, 점차 변해갈 것이다. 산에는 정상이 있지만 정상에 올라갈수록 그 면적은 줄어든다. 어떤 산이든 마찬가지다. 산이 높을수록 그 산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사람은 많아지지만 정상은 결국 하나의 점으로 귀결된다. 고로 정상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모두 같은 산을 오르기보단 각자 다른 산을 오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높은 산은 높은 산대로 매력이 있고 낮은 산은 낮은 산대로, 눈 덮인 산은 눈 덮인 산대로, 숲이 푸르른 산도, 계곡이 많고, 멋진 호수가 있는 산도, 살고 있는 동물이, 피어나는 열매가 매력적인 산도 모두 각자의 매력이 있다. 모두가 오르기 때문에 오르는 산을 굳이 오를 필요는 없다. 나는 나만의 등산이 있는 것이다.
자연생태계에는 수평저항성(horizontal resistance)과 수직저항성(vertical resistance)이라는 것이 있다. 수평저항성이 높은 생태계는 다양한 유전기질을 가진 식물이 존재하며 평균적인 저항력이 높은 것이다. 수직저항성은 일부 개체가 높은 저항성을 가진다. 치명적인 질병이 발생했을 때, 수직저항성이 높은 생태계는 낮은 확률이지만 그 일부 개체가 멸종하거나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반대로 수평저항성이 높다면 여러 작물이 피해를 입을 순 있지만 개체의 다양성으로 또한 여러 개체가 살아남을 것이다.
지금 사회는 특정 직업, 특정 가치만을 추구하는 수직저항성이 높은 생태계와 유사한 방향으로 가고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 속에 나는 수평저항성을 길러나가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