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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ae Mar 05. 2019

[베를린 템펠호프]착취의 공간이 모두의 공간이 되기까지

사회와 공간, 오픈스페이스 이야기

근 10년 만에 다시 시작한 건축공부가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쉽지 않았다. 1학기 시험을 마치자마자 내가 머물렀던 환경을 어떻게든 떠나고 싶어서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다. 2주 정도 5개 도시 정도를 돌았고, 돌아오자마자 학기가 시작해서 비엔나로 견학을 떠났다. 그리고 다녀와서 논문 준비 등으로 바쁘게 보내며 어떻게 잘 지내나 싶더니 아뿔싸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가 반가워서 옷을 가볍게 입어서 그런지 감기에 걸려버렸다. 약을 먹고 쉬어도 좀처럼 낫지 않고 영어단어들이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정리가 되지 않는 것 같아 여행 중 끄적거렸던 글을 좀 정리해보기로 했다.

베를린 국회의사당. 노먼포스터가 설계했다.

겨울의 베를린은 한산했다. 그리고 한산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베를린을 가보고 싶었다. 요란하게 여기저기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생기면 반드시 가야 하는 고집이 있는 편이다. 북부 유럽은 겨울에는 춥고 해도 짧아서 다들 기피하는데, 이번 방학 때 베를린에서 5일 정도 머물기로 했던 것은 첫째는 베를린 장벽 때문이었고, 둘째는 동독 시절 주거건축을 보고 싶어서였고, 셋째는 템펠호프 때문이었다. 덕분에 여행 중 방문했던 많은 건축물들이 어둠에 묻혀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운 날씨를 뚫고 열심히 다닌 덕에 현재 공부하고 있는 것들의 맥락을 아주 조금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은 템펠호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오픈스페이스의 맥락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Modernity and the Architecture of the city라는 수업 때 배운 내용과 개인적인 자료 수집과 직접 방문해서 느낀 내용들이 섞여 있다.)


르꼬르뷔지에의 UNITÉ D'HABITATION (왼쪽은 낮에 방문 했을 때 예상이미지(출처: 사진에 적혀있음), 오른쪽이 내가 본 건물ㅠ)

베를린의 역사와 템펠호프

구글에서 베를린의 항공사진을 보면 남쪽으로 마치 머리에 땜빵이 생긴 것처럼 동그랗게 생긴 공터가 있다.

땜빵을 한 번 찾아보기를.. (출처: 구글어스)

모던의 공간

복잡하고 밀도 높은 도시조직의 얼개를 벗어나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는 이 공간은 템펠호프 필드라는 곳으로 현재 시민들의 공원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현재의 평화로운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템펠호프는 꽤나 흥미로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중세 이후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제국 시대까지 오랜 세월을 군대의 행사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렇게 건물이 지어지지 않고 남겨진 이 너른 공지는 독일제국이 무너지고 비행기가 발명되기 시작하면서 유럽의 항공교통의 요지로 부상하게 되고, 1923년 공항이란 공간의 성격을 갖게 된다. 어렸을 때 위인전에서 읽었던 라이트 형제 중 동생인 오빌 라이트가 1909년에 이 곳에서 비행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계 2차 대전 이전에 템펠호프는 당시 유럽의 가장 활발한 공항이었는데 국내선, 국제선을 포함하여 약 90편의 항공기가 매일 템펠호프 공항을 거쳐 갔었다. 당시 항공교통은 지구의 크기를 비약적으로 축소시킨 근대의 발명 중 하나였는데, 베를린 시민들에게는 새롭고 근대적이고 기념적인 일들이 일어나던 곳이 바로 템펠호프 공항이었다.


(오른쪽) 오빌라이트의 비행 1909, (왼쪽) 북극탐사를 마치고 복귀하는 Graf Zeppelin에 인사하는 시민들 1931 (출처: 가디언지)


선전과 착취의 공간

그랬던 템펠호프가 오명을 얻게 된 것은 베를린에 있는 많은 건물들이 그러하듯이 전쟁과 나치의 집권과 연관이 있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은 후 Albert Speer라는 건축가에게 2차 대전 승리 후 건설할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 계획을 맡기게 되는데, 그중 템펠호프의 신공항터미널은 그 이름도 거창한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의 관문이자 상징물로 Ernst Sagebiel이라는 건축가에게 맡겨지게 된다. Ernst Sagebiel은 1934년에 설계를 시작하였는데, 설계안 발표를 위해 대형 모형을 여러 번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공항 터미널 건설은 1936년부터 1941년까지 계속되게 되고, 1945년까지 나치의 선전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사진은 거부감이 듦으로 굳이 붙이지 않기로 했다). 당시 템펠호프에는 무기 격납고가 있었는데, 당시 공항 건설과 무기 조립에 강제징용노동자들이 엄청나게 착취당했었다. 거대하게 지어지고 있는 신터미널 옆으로 강제징용소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착취를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현재 그 장소는 흔적을 완전히 감추었고, 부지에 팻말만이 남아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전쟁 때문에 신터미널의 공사가 끝나지 못해 구터미널은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Ernst Sagebiel의 템펠호프 공항 초기 설계, 모형이 엄청나다. 어휴 고생;;
당시 징용소 위치 (출처: 이거는 아무리 찾아도 자료가 없어서 Andre Loeckx교수님 수업자료에서 발췌...)

이때의 계획이나 건축이 역사적 사실과 뒤섞여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게르마니아의 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라던가 템펠호프의 공항터미널이 갖는 중앙으로의 응집력을 느끼게 하는 원호 모양의 형태와 관련이 있다. 실제로 그런 의도도 있었겠지만, 무언가 인간을 압도하고 조종하고자 하는 힘이 이런 형태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나치 군대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직선도로를 만들었고, 이를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 국회의사당에 있던 전승기념탑을 직선도로의 중심으로 옮겼다. 그리고 템펠호프가 가지고 있는 원의 형태를 지닌 광대한 공간은 나치의 선전 공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게르마니아 계획 출처: © J. Elke Ertle, 2017. www.walled-in-berlin.com (그들은 모형을 좋아했나보다..)

자유와 화해(?)의 공간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부터 이 공간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쓰여지게 되는데, 템펠호프 공항의 위치가 자유주의 진영의 미군령에 속하게 되면서 이 곳은 미군의 공항이 된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독일 전체를 4개의 승전국이 영토를 정해 나눠가지게 되는데, 수도인 베를린을 소련 혼자 독차지하게 하지 않고 베를린도 4개국이 나누어서 따로 지배를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서베를린은 동독 내에서 마치 섬처럼 둥둥 떠버리게 된다. 1948년 소련의 공습으로 서독지역에서 오는 육상교통을 동독지역에서 차단하면서 서베를린에 필요한 모든 물자는 항공으로만 운송이 가능하게 된다. 당시 미국령 서베를린 사람들의 식량, 생필품과 같은 구호물자 공급을 템펠호프 공항이 담당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49년 4월 6일 하루에만 1,398편의 비행기가 템펠호프 공항에 착륙했고, 약 1만 3천여 톤의 물자를 운반했다고 한다.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던 적들은 이 공항을 통해 친구가 되었고, 끔찍한 자유의 착취가 있던 공간이 자유(진영)의 통로로 여겨지게 되었다.

1948-1949년 사이 독일과 베를린
당시 비행기로 원조물자를 전달하는 모습(출처: 이것도 자료가 없어서 Andre Loeckx교수님 수업자료에서 발췌했습니다.)


템펠호프 공항의 폐쇄, 새로운 아젠다

그렇게 약 50년 동안 공항의 역할을 수행하던 템펠호프는 동서독 통일 이후 공항이 도심지에 위치해 확장이 어렵고, 원형 부지 때문에 활주로의 확장이 어려워 대형 항공기의 이륙이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2007년 폐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시민투표를 진행하게 된다. 투표 결과 60% 이상의 폐쇄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투표 참여율이 필요 참여율인 25%에 채 미치지 못해 결국 폐쇄가 결정된다. 템펠호프 공항이 서독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동독지역 주민들의 참여가 현저히 낮았었다고 한다.

2007년 투표 현수막 (alle macht geht vom volk aus: all power comes from the people이라고 적혀 있다.)


공항 폐쇄가 결정된 이후 이 넓디넓은 도심지 땅의 활용 및 개발을 위한 수많은 제안들이 나오게 된다. 부동산 개발 계획, 주택 부지 등 다양한 제안들이 오고 갔다. 그러던 중에 이 공간에서 포뮬러 F 챔피언십 경기가 있었고, 베를린 패션위크를 비롯한 많은 전시의 공간이 되었으며 뮤직 페스티벌을 위한 공연장으로도 활용되었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2015년에 나치가 설계한 터미널에 난민들을 위한 임시거처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 곳은 유럽에서 가장 큰 난민들의 임시거처가 되었다. (냉전 중에는 나치 시절에 격납고로 사용되었던 곳이 동독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의 임시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왼쪽: 템플호프 공항 내 난민임시거처(사생활보호가 되지 않도록 사진을 찍는 방식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오른쪽: 냉전 중 동독 피난민들을 수용했던 격납고 공간


시민의 공간

템펠호프 필드에 대한 수많은 개발계획이 있었다. 주거지역으로 개발하거나 일반 도심지역으로 개발하거나 공원으로 개발하는 등 많은 논의가 오고 갔지만, 2011년에 75%는 오픈스페이스로 남긴 채 25%를 주거 및 상업공간과 공공도서관 등으로 개발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를 기반으로 현상공모를 하게 되었다. 현상공모에 당선된 작품들이 있었고, 설계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패널 만들고 3D 이미지 작업하느라 건축가들이 많은 고생을 했겠으나 당선 안에 대한 반대 시위가 있었다.


2014년 진행한 주민투표 결과 템펠호프는 개발 없이 100% 오픈스페이스로 남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시민들이 도시의 공간을 자신들의 것으로 돌려받으면서 그것을 공유재산으로 남기겠다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2014년 투표 홍보물: (save field: last chance: people’s vote on Sunday라고 적혀 있다)




공간의 성격을 결정한 사용자, 시민의 힘

오픈스페이스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역사 이야기를 쓰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아무튼 겨울에 방문한 템펠호프 필드는 황량함 그 자체였다. 도심에 위치한 상상 이상으로 넓은 공간이었고, 많은 부분에서 효율성과 재개발이든 재생이든 개발논리에 기반한 생각이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도심 속에 이런 비싸고 큰 땅을 전부 오픈스페이스로 남길 수 있는 힘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했다. 활주로 위에서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작은 펜스들이 쳐진 공간들은 애완동물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겨울이라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곳곳에 바비큐 공간 등도 있는 것을 보니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역사의 사건들을 거쳐 현재 이 공간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아무 때나 그리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시민들의 것이 되었다.

황량한 템펠호프


그래서 베를린 여행은 겨울에 가는 게 아니다.

도시의 구획, 격자, 직선이 가지는 힘

나치시대의 건축 및 도시 계획들을 보면 공간을 지배하는 직선이나 격자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건축에서 격자(grid)가 여러모로 중요한 설계도구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삶은 격자에 맞춰져 있지 않은데 격자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직선이나 격자는 행동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효율적인 통치, 지배의 강화, 힘의 과시 등을 위해 사용되었다. 아름답고 거대한 건축물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힘은 그것이 권력을 강화하거나 과시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긴 직선의 축은 주변의 다른 작은 축들을 감소시키면서 도시의 위계를 만든다. 공간의 위계는 사회의 위계와 쉽게 연관된다. 또한 공간의 성격을 정하고 구획을 나누는 것은 공간의 탄력성(resiliency)을 감소시키고, 내가 걸어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 직선도로는 도보와 행동의 자유를 제한한다.


오픈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것이 오픈스페이스

템펠호프 필드에서는 그런 힘들이 느슨해진다. 도시의 주거 구획들과, 전철역, 건물들의 긴장감 있게 연결되던 도시조직이 템펠호프를 만나면 조직이 풀리면서 느슨해진다. 이 필드 안에는 활주로와 잔디가 있지만 보행자는 활주로 위로도 잔디 위로도 걸을 수 있다. 광활한 공간 위에 어떤 구조물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든지 해체할 수 있는 임시로 설치해 놓은 칸막이들이 애완견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을 뿐이다.

길은 없지만 방향은 있다
강아지들이 뛰어놀 수 있는 장소


도시의 오픈스페이스는 무상교육이나 의료보험 같은 것이다. 내가 경험한 몇몇 도시들 중에 건물에 들어가야만 안정감이 느껴지는 곳들이 있었다. 나에게는 자카르타나 마닐라의 쇼핑몰들이 그랬다. 도시에 오픈스페이스가 많지 않을뿐더러 인도도 좁아 걷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쇼핑몰은 넓고 쾌적한 실내공간들을 제공한다. 상점들과 레스토랑들로 가득한 쇼핑몰은 자연스럽게 도시 내의 공간과 사람의 구분을 만들어낸다. 어느 사회든 역사적으로 서로의 다름을 구분하고 구획화하려고 하는 것은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 중요하고, 그런 공간들을 통해 사회의 긴장감을 낮출 수 있다. 무상교육과 같은 복지시스템이 사회의 격차를 어느 정도 해소하는 것처럼 오픈스페이스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템펠호프가 100% 오픈스페이스로 결정되기 전에 부동산 개발 계획 등 다양한 제안이 오고 갔다고 한다. 내가 베를린에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디 계속해서 오래도록 이렇게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너른 공간에서 계절마다 달라지는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고 베를린의 증가하는 난민들과 이민자들의 삶 또한 구분 없이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외국인 여행자로서 갑갑하게 건물들이 연이어 모여 있는 도시를 걷다가 템펠호프의 광활함을 만나게 되었을 때 숨을 크게 내쉬고 긴장이 풀리는 것을 경험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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