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지속가능성인가.
나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현장에서 경험했던 소액금융에 대해서 열렬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꽤 있다. 주택소액금융을 사업모델 중 하나로 사용하고 있는 단체에서 8년여를 일하며, 현장을 경험하며 나는 소액금융의 지지자이자 비판자가 되었다. 현장에서 경험한 것들을 나중에 꼭 글로 남기고자 결심했었는데, 최근 소액금융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을 읽으며 이미 이런 논의가 국제사회의 오래된 이슈이고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이미 찬양과 반성과 수정이 반복되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책은 방글라데시 출신 경제학자 마리아 카림의 "가난을 팝니다"이고 두 번째 책은 영국인인 휴 싱클레어의 "빈곤을 착취하다"라는 책이다. 위의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방글라데시 출신으로서 또 영국인으로서의 서로 다른 관점을 볼 수 있었다. 책의 내용도 너무 흥미로웠지만 좀 더 깊은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인트로로 내가 경험했던 현장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려고 한다.
나는 네팔, 방글라데시, 인도, 우간다 등지를 다니며 지역사회에 깊게 뿌리내려 있는 소액금융을 보았다. 위의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경험한 것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소액금융이 혁신적인 빈곤 해결 방식이라고 생각했고, 그다음에는 의심했다.
구석구석 다양하게 사용되는 소액금융
나는 2011년 네팔에 파견을 나갔을 때 처음으로 주택소액금융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일하던 단체는 100만 채의 주택을 소액금융을 통해 제공하고자 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100만 채라는 숫자를 어떻게 채우나 했더니 소액금융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주택소액대출을 받는 사람의 양적 목표를 100만 채로 잡았던 것이었다. 그 단체는 네팔 전역에 스물몇 개 되는 현지소액금융 기관들을 선정하고 교육하고 대출금의 일부를 소액금융기관에 지원해서 주거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현지의 주택 시장조사를 통해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가난한 이들의 주택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를 1) 지역사회에서 고용할 수 있는 노동력의 낮은 질 2) 저렴하고 품질 좋은 건축자재의 부족 3) 저렴하고 품질 좋은 주택모델의 부족 그리고 4) 가난한 이들이 집을 개선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어려움 등으로 보았다. 이 중 네 번째 문제를 주택소액금융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는데(다른 3개의 문제들은 각기 다른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어 개입되었다), 지역주민들에게 주택을 수리하거나 새로 짓는 비용으로 빌려준 후 상환을 받는 방식이었다. 네팔 전역에 구석구석 퍼져 있는 소액금융 네트워크를 이용해 거대한 숫자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최소의 자원으로 최대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조직 내부에서 찬양받았고, 많은 국제행사에 초청되어 혁신사례로 소개되었었다.
이렇게 네팔에서 알게 된 소액금융은 그 후로 방문했던 방글라데시,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우간다 등등 수많은 국가들의 작은 시골 지역사회 곳곳까지 퍼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중 몇몇 소액금융기관들은 이미 대형화되어 지역사회 내에서 엄청난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내가 일하는 기관에서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주택소액금융처럼 다양한 개발사업에 소액금융방법이 다양한 방식으로 접목되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거대하게 형성되어 있는 시장이 지속가능성을 빌미로 철저하게 시장의 기능에 의존하고 있었고, 그 규모가 큰 만큼 통제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지속가능하기 위한 지속가능성 외침
당시 우리와 함께 사업을 했던 소액금융 단체들이 맡은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99.9999%의 상환율이 적힌 상환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아파트 전세자금 갚는 것보다 더 성실하게 그 마을의 가난한 주민들이 돈을 갚고 있었다. 그 데이터를 보면서 당시 어리고 경험도 없었던 나는 어떻게 이 시골의 작은 기관이 이런 기적적인 상환율을 만들 수 있는지, 이 곳의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성실한지에 대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실로 벅찬 순간이었다. 그동안 기회가 없어서 가난했던 것이지 기회가 주어지면 충분히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액금융이 그 가능성을 발현시켜준다고.
시간이 지나 많은 국가들의 다른 사례들을 들여다보고 더 많은 현장을 왔다 갔다 하며 주민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아니면 나는 이 시스템에 큰 의문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일 년에 2-4번은 네팔을 꼬박꼬박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같은 데이터와 같은 정보를 보고하는 현지 협력기관 직원들에게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현장을 방문하던 중 혼자 어느 집에 남게 되어 통역의 도움을 얻어 현지 주민 중 한 사람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사람은 본인이 그 집을 짓게 되는 데까지 얼마만큼의 돈을 빌렸는지, 이자가 얼마인지, 매달 두 번씩 갚는 상환금에서 원금과 이자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자신이 그 돈을 내지 못하면 이웃들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에 돈을 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 소액금융 기관은 과거 한국의 오가작통법과 같이 마을의 5-10세대를 한 그룹으로 묶어 연대책임제를 실행하고 있었다. 한 가족이 돈을 내지 못하면 다른 가족이 예금한 금액에서 상환금을 가져가기 때문에 99%와 같은 비현실적인 상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해당 소액금융기관은 현지의 경제상황에 맞추어 약 18~23% 정도의 이자를 부과하고 있었다. 소액금융들은 그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올 때 이자가 13~15% 정도가 되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이자를 책정하는 것이 기관을 운영하기 위한 적절한 비용을 부과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관을 운영하는 데에는 운영비가 들어간다고 했다. 그리고 입을 모아 이것이 "지속가능한 방법"이라고 우리가 지속가능할 수 있어야 우리를 통해서 도움을 받는 주민들도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나는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현지 지역사회의 소규모 경제구조를 뜯어보았을 때 누군가가 돈을 빌려서 18~23% 정도의 이자를 납부하려면 채무자가 빌린 돈을 가지고 하는 일련의 경제활동들이 그 이상의 경제적인 이득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지역사회에 형성되어 있어야 그들에게 실제적인 이익이 발생한다고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농사를 짓기 위해 10만 루피를 빌린다면 10만 루피의 투자를 통해 농사를 지어 2만 루피 이상의 소득을 발생시켜야 그 프로그램이 현지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발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주민들은 열심히 일해서 자산을 깎아먹는 격이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곳의 가난한 주민들은 대부분 땅도 없고, 농업기술이나 가축을 기르는 기술도 없었다. 그래서 사업에 실패할 확률도 더 높았고, 가진 게 없기 때문이 리스크도 더 컸다. 지역사회에 소액금융을 통해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면 물가에도 변동이 일어나 실제 예상하던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 역량이나 시스템 없이 개인의 금융에 대한 접근성만 향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중에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리스크를 고스란히 지역사회와 고객이 부담하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의 성실함을 팔아 욕심 채우기
생활이 어려워져서 돈을 내지 못하게 되면 옆 집이 책임을 져야 하고 그러면 지역사회에 문제가 되는 상황을 마주할 것이라는 것, 많은 수의 사람들은 소규모 사업이나 농사에 실패하게 될 것이라는 것, 가정에 갑자기 목돈이 필요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항상 같은 문제가 존재한다. 그런데 어떻게 소액금융을 하는 그 많은 기관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성실함', '착함', '지역사회의 연대'가 그 모든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고 그것을 우리는 믿었는지 모르겠다. 정의로운 분배의 메커니즘과 보장에 대한 정책적 지원 없이 가난한 시골지역에 뿌리내린 소액금융상품들은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액금융 기관들은 가난한 이들을 "고객"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지위가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이야기했다. 가난한 이들은 수혜자가 아닌 "고객"이 되는 대가로 소액금융기관들의 이익을 보장해주고 그들을 지속가능하게 해 주어야 했다. 소액금융기관들은 기관의 지속가능성과 수입은 확실하게 보장하는 다양한 정책을 가지고 잇었지만, 그 자금을 운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리스크들을 가난한 사람들(그러면서 고객이라고!!!)에게 부과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금융이라는 거대한 시장, 시스템과 자랑스럽게 보고되는 수혜자의 숫자들 속에서 배 불리는 사람들은 소액금융기관들이었고, 실제로 가난한 이들의 삶이 장기적으로 나아지는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았다. 소액금융기관들이 대출금으로 지원하는 금액의 상당 부분이 무상원조로 지원되기도 했다.
이런 구조에서 원조를 통해 배를 불리는 곳은 소액금융기관이라 불리는 중간조직이었으며, 그들은 갚을 필요 없는 무상원조 자금과 가난한 이들에게서 받는 이자로 지역사회의 권력자가 되어가고 있었고, 가난한 이들은 점점 더 가난해져가고 있었다.
보완하자
소액금융은 가난한 이들에게 금융상품 사용의 기회를 확장한다는 좋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꼭 필요한 돈을 빌릴 수 있는 창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소액금융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가난한 지역사회에 행사하는 소액금융의 힘을 볼 때 두려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방법으로서의 소액금융은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실한 몇 명이 만들어 낸 성공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소액금융으로 인한 빚 때문에 자살하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프로그램에 대한 수정과 재고려를 해야 한다. 소액금융기관들은 선하고 성실하게 돈을 갚는 사람들이 필요하지만 그들을 선하게 다루지 않는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 누군가는 어차피 그 소액금융기관들도 가난한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성장하면 지역사회의 가난한 사람들도 결국 이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글쎄. 그렇다면 정의롭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익을 분배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좀 더 건강한 금융이 지역사회에 뿌리내리게 했어야 하지 않을까.